'들을 수 있을 때' 들어야 할, 검은 산에 묻힌 목소리

권동희 2026. 4. 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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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생생히 기록한 탄광 노동자와 가족들의 삶... <쇳돌>을 읽고

[권동희]

2024년 6월 말, 장성탄광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무렵 탄광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접했다. 화면 속, 광산 붕괴 사고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한 유족이 위령제에서 오열하며 외쳤다.

"우린 '산업 전사'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냥 우리 아버지만 있으면 돼요."

산재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그 삶의 궤적이 나의 과거와 너무도 선명히 겹쳐 보여, 나는 한참 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직도 초등학교 입학 전,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영주에서 철암으로 향하는 완행열차에 올랐던 기억이 선하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그때의 잔상은 '흰 상복을 입은 유족들과 온통 검은색으로 뒤덮인 산'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검은 산이 폐광의 흔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긴 세월이 지나, 어느덧 산재 전문 노무사로 산 지 2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수많은 산재 노동자와 유족을 만났다. 한 분 한 분의 삶이 '산재'라는 거대한 불행 앞에 어떻게 송두리째 흔들리는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사건 이후 그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적막 속으로 묻히는지,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그날 이후'에 대하여 얼마나 무관심한지 뼈저리게 느껴온 세월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가공되지 않은 목소리를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를 늘 고민해 왔다. 또한, 남겨진 유족들이 견뎌온 모진 삶을 누군가는 깊이 들여다봐 주기를 간절히 바라오기도 했다.

탄광 노동자와 가족들의 생생한 목소리

책 <쇳돌>(2026년 2월 출간)은 탄광 노동자의 삶을 단순히 조명하고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엄청난 노고와 인내로 길어 올린 이 책은 건조한 자료나 흐릿한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빌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버텼는지, 나아가 어떻게 서로 연대하며 온기를 나누는지를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1, 2부에 담긴 광부 가족의 삶은 시대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작가는 상투적인 드라마의 문법을 따르는 대신,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한국 사회가 외면해 왔던 여성들의 삶과 노동, 그리고 그들의 일상을 조명하는 내내 차분하고도 따스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어지는 3부는 '산업전사'나 '증산보국'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은폐 되어 온 노동자들의 죽음과 질병이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묻는다. 광부들의 참혹한 희생을 빼놓고 한국의 직업병과 산업재해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이는 이를 단지 과거의 일로 치부하곤 한다.

나는 매월 개최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진폐증, 근골격계 질환, 소음성 난청 등 대여섯 건의 탄광 노동자 산재 사건을 마주한다. 탄광을 떠나 조경, 경비, 식당, 요양보호사 등 또 다른 고된 현장으로 이직한 이들의 산업재해도 흔히 접한다.

간혹 오랜 투병 끝에 합병증이나 암으로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의 서류를 넘길 때면, 강원도의 어느 산재병원에서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을 이들과 그 가족의 슬픔이 가슴에 박힌다. 차가운 서류 속 '사건'이 아니라 그들의 '삶' 자체를 직시할 때, 비로소 그 속에 숨 쉬는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 매년 2000여 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목숨을 잃는 지금, 노동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산업 전사'를 외치던 1970~1980년대와 비교해 과연 무엇이 달라졌는가.
 쇳돌 - 사라지는 세계, 사라지는 노동, 사라지 는 목소리를 채굴하기(이라영 지음)
ⓒ 동녘
지금도 진행 중인 '탄광 사람들의 역사'

오래 전, 가족이 지나온 시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여름 휴가 때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갔던 철암을 다시 찾은 적이 있다. 작가는 태백석탄박물관에서 형형색색 빛을 발하는 원석들에 감탄했다고 했지만, 내 시선이 머문 곳은 달랐다.

구석에 작게 전시된 산업재해 사망 기록, 유족 증서, 그리고 한자로 쓰인 빛바랜 합의서를 보며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갑작스러운 가장의 죽음과 지옥 같았을 슬픔, 경황없이 찍었을 합의서의 도장, 그리고 이어지는 이주와 남은 이들의 고된 생존.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어머니와 우리 가족이 온몸으로 겪어낸 서사였기에, 내게 그것은 결코 단순한 종잇장이 아니었다. 기록은 단순히 서류로 남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의 삶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온전히 담아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수많은 노동자와 가족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토대로 쓰였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4부 '목소리들, 들을 수 있을 때 듣기'가 내게는 가장 깊숙이 와 닿았다. 광부로 살았고 지금도 현장을 지키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곁을 지킨 '광부댁'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 기록이 과거의 비극에 박제 되지 않고, 현재의 다양한 삶과 어떻게 따스하게 연결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고단했던 삶과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마주하며, 여전히 현장을 꿋꿋하게 지키는 이들과 못다 이룬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는 이들을 본다. 그 치열한 삶의 궤적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를 자문하며, 내 삶의 부족함을 겸허히 되돌아보게 된다.

결국, 이 책은 '과거의 광산'에서 잊힌 노동자들의 삶을 되짚는 것을 넘어, 서로 연대하며 이어지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일깨워준다. 나아가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내일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희망을 보여준다. 640페이지라는 묵직한 기록의 무게를 이 짧은 글로 다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이토록 주옥 같은 목소리를 세상에 길어 올려준 작가에게 깊은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 싶다.

세상은 '막장'이라 불렀지만, 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안방'이었던 광산. 그 어둠 속에서 빛을 캐 올렸던 모든 노동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바치며, 우리 시대의 필독서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 4월호에도 실립니다.이 글을 쓴 권동희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으로 공인노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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