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예술의 확장된 무대, 서울예술상을 다녀와서
[이규승 기자]
대중문화에는 누구나 아는 흥행의 언어가 있다. 누적 관람객 수, 매출액, 화제성, 그리고 그 성취를 다시 확인하는 시상식의 조명들.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역대급 흥행 갱신은 지금 한국 대중문화가 얼마나 강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얼굴의 문화 예술도 숨 쉬고 있다.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다음 해를 장담할 수 없고, 한 편의 공연이 끝난 뒤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조차 확신할 수 없는 예술 분야라고 지칭하면 맞을까. 혹자는 이런 얘기를 한다. "대중문화에 백상예술대상의 화려함이 있다면, 순수기초예술에는 서울예술상을 주목해야 한다"고.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KBS홀에서 그 이유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계속할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그 한 문장의 소감이 KBS홀의 객석 공기를 잠깐 붙들었다. 짧은 정적이 흘렀지만 이내 박수가 쏟아졌다. 그 환호에는 단순히 수상자에 대한 축하만이 아니라, 버텨온 시간에 대한 공감과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다짐이 함께 섞여 있어 보였다.
그날 <서울예술상>이 열렸던 KBS홀은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뜨거웠다. 13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사이로 기대와 긴장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극장 로비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수많은 장르의 예술가들이 짧게 인사를 나눴고, 객석에서는 프로그램북을 넘기며 오늘의 이름들을 짚어보는 손길이 분주했다(이날의 대상 수상자는 끝까지 베일에 싸여 시상에 대한 기대감 또한 높았다).
웃음소리도 들렸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서울예술상은 단순한 수상자 발표가 아니라, 지난 1년 동안 누가 어떤 시간을 건너 여기까지 왔는지 서로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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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5일 KBS홀에서 열린 제4회 <서울예술상> 시상식 현장 |
| ⓒ 이규승 |
대상 수상작인 춤판야무의 <누수>가 무대에 오르자 객석의 공기는 선명하게 바뀌었다. 종이컵과 도배지, 테이프 같은 일상의 사물들이 무용수의 몸과 얽히며 낯설고도 정확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무대 위에서는 가난과 소진, 균열과 불안이 몸의 언어로 드러났다. 주변의 관객들도 조금씩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누군가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누군가는 손을 모은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장면이 끝난 뒤 박수가 터졌지만, 그 직전의 침묵이야말로 가장 깊은 반응이었다.
이어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바디콘서트>가 무대를 채우자 분위기는 또 달라졌다. 리듬은 객석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었고, 몸은 공간을 시원하게 가르며 관객의 감각을 흔들었다. 한쪽에서는 웃음이 번졌고, 다른 쪽에서는 박수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날의 무대는 장르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보여주었다. 서울의 순수기초예술이 얼마나 다양한 형식으로 같은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마침내 대상이 호명됐다. 춤판야무의 <누수>. 무대 위로 오른 이들의 얼굴에는 환희보다 놀람이 먼저 번졌다. 이어진 소감은 짧았지만 깊었다. 삶을 몸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는 말. 그 문장은 작품의 과정 전체를 압축하고 있었다. 서울예술상은 완성된 결과만 칭찬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쌓인 시간까지 함께 불러내는 자리라는 사실이 그 순간 또렷해졌다.
예술 생태계의 현재와 축적을 함께 보여주는 자리
특별공로상을 받은 배우 박정자가 무대에 섰을 때 객석은 조용해졌다. 그것은 연출된 침묵이 아니라, 긴 시간을 통과해 온 예술가 앞에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예의에 가까웠다. 그의 존재는 그 자체로 한국 연극의 한 시절을 증명하고 있었다.
올해 서울예술상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상은 지금 막 살아 움직이는 창작의 현재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 예술 현장을 지켜온 시간의 깊이까지 함께 바라본다. 자생적 창작을 비추는 상까지 더해지며 서울예술상은 단순한 시상식을 넘어 예술 생태계의 현재와 축적을 함께 보여주는 구조를 갖췄다.
이 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순수기초예술은 늘 시장의 속도 뒤로 밀려나기 쉽다. 당장 숫자로 환산 되기 어렵고, 빠르게 소비되는 흐름 안에서는 존재를 증명하기가 더 힘들다. 그러나 도시의 문화적 깊이는 대개 그런 예술에서 만들어진다. 당장 크게 팔리지는 않아도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 요란한 소음 대신 천천히 사람 안으로 스며드는 작품들 말이다. 서울예술상은 바로 그런 예술을 공적으로 불러 세운다. 잘 팔린 작품보다 오래 기억될 작품, 크게 소비되기보다 깊게 남을 작품을 향해 박수를 보내는 자리다.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며 가장 크게 느낀 것도 그것이었다. 이 상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라, 무엇이 끝내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야 하는가를 묻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날의 박수는 축하를 넘어 "계속해 달라"는 부탁처럼 들렸다.
세 시간에 걸친 녹화 방송이었지만 행사가 끝난 뒤에도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쉽게 자리에서 뜨지 못했다. 객석의 불이 켜졌는데도 한동안 무대 쪽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고, 로비로 내려와서도 방금 본 장면을 곱씹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군가는 특정 장면을 다시 떠올렸고, 누군가는 올해의 수상 결과를 조용히 되짚었다. 그날 KBS홀의 밤은 분명 끝났지만, 그 안에서 생겨난 감정은 쉽게 끝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예술이 오래 살아남는 방식
내가 현장에서 느낀 여운은 시상식장 밖에서도 길게 이어졌다. 시상식이 열리기 불과 며칠 전, 극단 명작 옥수수밭의 최원종 연출가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세기의 사나이>가 서울예술상 스팍 포커스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소식과 함께, 그는 뜻밖에도 내가 소개했던 작품의 글을 먼저 떠올렸단다(관련 기사 :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사나이, 무대는 그를 기억했다"). 내가 그의 문자에서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마지막 한 마디였다.
"이 작품이 더 오래, 더 길게 이어질 수 있도록, <세기의 사나이>가 매년 무대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더 힘을 내어 달려보겠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날 KBS홀의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이름이 불리기 직전의 떨림, 소감 앞에 내려앉던 침묵, 박수 속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던 예술가들의 어깨. 결국 예술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고, 또 다른 누군가의 문장 안에서 다시 숨을 쉬며 다음 무대로 건너가는 것.
최 연출가의 문자는 단순한 감사 인사를 넘어, 예술이 어떻게 오래 살아남는지 보여주는 조용한 증언처럼 다가왔다. 작품은 무대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관심 속에서, 누군가의 기록 속에서, 누군가의 오래된 응원 속에서 다시 자란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한 번 무대에 오른다.
그래서 서울예술상의 밤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화려한 조명보다 사람의 얼굴이 생각난다. 무대 위에서 떨리던 손, 이름이 불리기 직전 굳어 있던 표정, 박수 속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던 예술가의 어깨, 그리고 행사가 끝난 뒤에도 쉽게 흩어지지 않던 사람들의 뒷모습. 그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예술은 혼자 남지 않는다고. 누군가 보고, 누군가 기억하고, 누군가 다시 불러줄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고.
제4회 서울예술상 시상식은 오는 20일 밤 11시 35분, KBS1을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화면이 그날 KBS홀의 모든 숨결을 다 담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밤의 진심만은 충분히 전해질 것이다. 순수기초예술이 왜 여전히 우리 곁에 필요하고, 왜 끝내 지켜야 하는지 다시 묻게 하는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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