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발굽 닮은 천연 요새, 내장산이 품고 지켜낸 것

이완우 2026. 4. 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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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유민의 저항부터 의병의 함성까지… 벽련암에서 굽어본 계곡의 역사

[이완우 기자]

 내장산 벽련암 백련선원 문루와 전경
ⓒ 이완우
(이전 기사 : 15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부처가 되기까지 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5일, 정읍 내장사에서 대웅전 삼존불 점안식이 거행되었다. 내장사 대웅전 오른 편으로 거대한 암벽 능선인 서래봉이 활짝 피어난 연꽃의 꽃잎처럼 다가왔다. 150년 된 은행나무가 삼존불로 다시 태어난 점안식을 참관하고, 기자는 서래봉 아래 벽련암으로 발길을 옮겼다.
 내장산 내장사 대웅전과 서래봉 능선 풍경
ⓒ 이완우
내장사 안내판에는 구 영은사지라고 쓰여 있고, 벽련암에는 구 내장사지라고 소개되어 있다. 내장사와 벽련암은 내장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유적지이다. 백제 무왕 때인 636년에 영은사(현 내장사)가 창건되었고, 의자왕 때인 백제 멸망 시기인 660년에 내장사(현 벽련암)가 백련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정읍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백련사가 백제 멸망 시기에 험준한 내장산의 지형을 배경으로 백제 유민들이 몸을 숨기고 신라에 항거하였던 역사적 근거지로 해석한다. 가을 단풍의 잘 알려진 내장산의 절경 깊이에는, 역사적인 위기와 시련의 시대마다 백성들이 찾아들어 의탁했던 수호와 저항의 세월이 '내장(內藏)'되어 있다.
 정읍 내장사 일주문, 오른쪽 산길로 오르면 백련암에 이른다.
ⓒ 이완우
 내장산 벽련암 가는 길의 야생화 봄꽃
ⓒ 이완우
내장사 일주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 약 800m의 산길을 오르면 벽련암에 닿는다. 봄을 맞아 산벚꽃이 피는 산길에서 가장 먼저 여행자를 반기는 것은 봄 볕에 얼굴을 내민 야생화들이었다.

남산제비꽃이 가녀린 줄기 끝에 하얀 꽃잎을 피우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메마른 낙엽을 딛고 선 그 청초한 자태에서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고깔제비꽃은 진한 분홍색이 산길을 봄의 환희로 물들였다. 바위 좁은 틈새에 뿌리 내리고 기어이 꽃을 피워낸 모습이 대견하였다. 현호색은 종달새의 깃을 닮은 듯한 형상으로 봄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쳤다.

벽련암에서 마주한 서래봉의 장엄한 연꽃 바위

벽련암 입구에 이르렀다. 벽련선원 누각에서 건너다 보이는 내장산의 연봉 능선.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이 장엄하게 펼쳐졌다.

벽련선원 왼쪽으로 보이는 장군봉은 벽련암 남쪽 1.7km 위치, 오른쪽의 연자봉, 벽련암 대웅전 뒤로 북서쪽 480m 서래봉의 연꽃 형상 암봉들이 줄지어서 장관이었다. 벽련암의 남서쪽 직선 거리 500m 거리 아래쪽에 있는 내장사는 보이지 않았다.
 내장산 벽련암 대웅전과 후경
ⓒ 이완우
벽련암 대웅전 앞에 섰다. 사찰 멀리 병풍처럼 둘러선 기암괴석의 봉우리들이 마치 부처를 호위하듯 장엄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 아래 낮은 지형에 있는 내장사는 구름 속에 잠긴 듯 고요하고, 머리 위로는 깎아지른 서래봉 절벽이 하늘을 받치고 선 형국이었다.

내장산 내장사와 벽련암을 품고 있는 계곡은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 까치봉, 연지봉, 망해봉, 불출봉과 서래봉의 8개 봉우리들이 말굽 형태로 이어진 포곡식(包谷式) 지형이다. 어머니가 보자기로 귀한 것을 싸 안은 형상이었다. 외부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입구만 지키면 난공불락의 입보산성(入保山城) 같은 천연 요새가 된다. 사찰의 고즈넉함과 웅장한 산세가 함께 다가왔다.

1400년 전 백제 멸망의 시기에 내장산 지역이 호남 서해안의 주류성과 두량이성 등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들과 연계하여 백제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백제 유민들의 최후의 보루였다고 한다. 이러한 지역 사학계의 해석은 험준한 지형이 말없이 증명해 주는 듯하였다.

조선 시대 중종 34년(1539년), 호남 지역 승려 3000여 명을 환속 시켜 군적에 올렸다. 이에 반발한 승려들이 내장산에 모여 집단 항거하였다. 조정은 내장사와 영은사를 '도둑의 소굴'로 규정하고 불을 질러 폐찰 시켰다. 이는 당시 내장산이 호남 불교계의 강력한 구심점이자, 산악 지형을 활용하여 국가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갖춘 곳이었음을 방증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낸 '용굴'

내장산은 임진왜란의 포화 속에서 조선의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구한 의미 깊은 장소다. 1592년,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 실록이 불타버렸을 때, 정읍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은 실록 60여 궤를 메고 내장산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을 맞이한 것은 폐찰의 아픔을 딛고 내장사를 중건한 희묵(熙黙) 대사였다. 희묵 대사는 승병을 조직해 험준한 암벽 중턱의 용굴(龍窟)과 은적암으로 실록을 이안(移安)하고, 1년 넘게 밤낮으로 경계에 임했다.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이 온전하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내장산이라는 거대한 '금고'와 그 문을 지킨 민초들의 헌신 덕분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 패배 후 마지막 재기를 도모하며 내장산 계곡으로 모여들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몸을 숨겼던 피노리 역시 이 내장산 권역의 연장선에 있었다. 내장산의 요새 안에서 구한말 유림들은 서보단(誓報壇)을 쌓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국권 회복을 맹세했다. 정읍 지역의 유림들이 주도한 이 결의는 훗날 면암 최익현을 중심으로 한 호남 의병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내장산 백련암 도량 연못의 관음보살 좌상
ⓒ 이완우
벽련암 도량 연못에 관음보살이 자비로운 눈길로 이 굽이 치는 계곡을 굽어보고 있었다. 작은 연못의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연꽃 좌대와 관음 좌상을 모셨다. 목련꽃 나무가 새싹이 돋는 연두색 숲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봄바람에 떨어진 목련 꽃잎이 연못 위에 고요히 떠 있었다. 관음보살의 시선은 단순히 풍경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고비마다 이 험준한 골짜기로 스며들었던 민초들의 아픔과 절박한 기도를 어루만지는 듯하였다

천불전(千佛殿)에 모셔진 천 개의 불상은 백제 망국의 유민으로, 실록을 짊어지고 바위굴을 오르던 장정으로, 혹은 구국의 일념으로 일어선 의병으로 이 계곡에 생을 의탁 했던 이름 없는 백성들이 피워낸 화신(化身)으로 보였다. 천불 불상 좌대마다 정성스레 새겨진 시주자들의 이름은 금빛 미소가 되어 이 내장산 계곡에 의탁한 수많은 이들의 간절한 삶의 흔적을 묵묵히 증언하며 잊지 않고 있었다.

우리 곁의 '도장방', 내장산을 다시 보다

내장산 벽련암을 내려오는 길목에서 이색적인 식생을 만났다. 바로 소나무 숲 사이로 초록빛을 뽐내는 굴거리나무다. 본래 따뜻한 남쪽 해안가에서 자라는 난대성 식물인 굴거리나무에게 내장산은 생존할 수 있는 '북방한계선'이다.

이들이 이곳에 뿌리 내릴 수 있었던 것은 내장산의 말발굽 지형이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연 요새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러했듯, 자연 또한 내장산의 품 안에서 보호 받고 있었던 셈이다.
 내장산 백련암 길목의 소나무 숲과 굴거리나무
ⓒ 이완우
내장산 벽련암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오면서 내장산 계곡이 문득 도장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한옥에서 내밀하고 귀중한 물품을 보관하는 곳을 '도장방'이라 불렀다.

호남평야는 문전옥답, 정읍 고을은 안방이라면, 내장산과 깊은 계곡은 도장방이었다. 내장산은 역사의 위기 때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중하게 지킬 것을 지켜내고 맞설 것에는 저항하며 다음 시대로 기록과 정신을 온전하게 넘겨준 거대한 역사의 '도장방'이었다.

내장사 대웅전에서 점안식을 통해 새 눈을 뜬 불상처럼, 내장산의 여행을 통해 붉은 단풍 너머에 숨겨진 역사의 축적된 층위를 살펴보았다. 내장산은 역사의 시련을 묵묵히 받아내어 세대를 이어가는 생명력으로 바꾸어낸 거대한 어머니의 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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