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이 빚고 바다가 다듬은 섭지코지

전갑남 2026. 4. 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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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봄 기행 13] 붉은오름과 선돌바위, 전설과 생명이 머무는 길목을 찾아서

[전갑남 기자]

 붉은오름 정상에서 마주한 하얀 방두포등대.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선명한 흰색은 섭지코지 풍경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 전갑남
제주 동남쪽 해안, 성산일출봉과 마주하며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땅이 있다. 바로 섭지코지다. '섭지'란 재주가 뛰어난 선비(才士)가 많이 배출되는 땅이라는 뜻이고, '코지'는 바다 쪽으로 툭 튀어나온 '곶'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름의 유래를 곱씹어 보니, 과연 이 땅이 어떤 비범한 풍광을 숨기고 있을지 설레는 마음이 앞선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붉은 울림

서귀포시 성산읍에 자리한 이곳은 무엇보다 해넘이 명소로 이름이 높다. 수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며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장관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대개의 여행자가 성산일출봉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면, 섭지코지는 그 하루를 가장 장엄하게 마무리 하는 완결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산책로에서 만난 '섭지연대'. 횃불과 연기로 긴박한 소식을 전하던 옛 통신 시설은 이제 평화로운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되어 여행자를 맞이한다.
ⓒ 전갑남
산책로 초입, 길을 따라 묵묵히 서 있는 '섭지연대'가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추게 한다. 횃불과 연기로 긴박한 소식을 전하던 이 옛 통신 시설은 이제 평화로운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대가 되었다. 연대 위에 올라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방을 둘러보니, 제주는 비로소 그 속살을 슬며시 내보인다.
발아래 서걱거리는 붉은 화산송이는 먼 옛날 이곳이 뜨거운 용암의 분출구였음을 조용히 속삭인다. 이 붉은 흙의 질감은 섭지코지가 한라산의 뜨거운 숨결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신양리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기 위해 세운 세 개의 바위 무덤, 삼석총. 척박한 땅에서 삶을 일궈온 사람들이 바친 간절한 기도가 이 거친 돌무더기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듯하다.
ⓒ 전갑남
조금 더 길을 이어가면 신양리 마을의 설촌 유래가 깃든 '삼석총(三石塚)'과 '포제단'을 마주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액운을 막기 위해 세운 세 개의 바위 무덤인 삼석총과,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정성껏 제를 올리던 포제단은 섭지코지의 아름다움이 단순히 자연의 산물만이 아니라,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오랜 기도가 쌓인 결과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코뿔소를 닮은 성산일출봉과 선돌의 전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전 세계 화산학자들이 성지로 꼽는 성산일출봉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성산의 형상이다. 거대한 몸집을 바다에 담근 채 뭍을 향해 뿔을 치켜든 코뿔소를 쏙 빼닮았다.
ⓒ 전갑남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전 세계 화산학자들이 성지로 꼽는 성산일출봉의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성산의 형상이다. 거대한 몸집을 바다에 담근 채 뭍을 향해 뿔을 치켜든 코뿔소를 쏙 빼닮았다. 마치 섭지코지라는 요새를 지키는 영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맞은편 해안 절벽은 아찔한 생동감을 전한다. 검붉은 화산 암반이 톱니바퀴처럼 바다를 향해 돋아나 있고, 그 틈 사이로 하얀 포말이 부서진다. 귀를 때리는 거친 바닷바람과 기암괴석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소리는 대자연이 연주하는 웅장한 교향곡과 같다.
 일렁이는 파도를 벗 삼아 검은 바위 위에 선 강태공들. 그들의 뒷모습에서 고기 대신 세월을 엮는 듯한 낭만이 느껴져 못내 부럽다.
ⓒ 전갑남
그 거친 숨 몰아치는 검은 바위 위에서 일렁이는 파도를 벗 삼아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기 대신 세월을 엮는 것은 아니겠지! 바다와 하나가 된 듯한 그들의 낭만이 못내 부럽다. 산책로 주변으로는 이제 막 고개를 내미는 노란 유채꽃이 섭지코지의 붉은 흙과 대비되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척박한 바닷바람을 견디며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갯쑥부쟁이의 강인한 생명력 또한 발길을 붙잡는다.
특히 등대를 마주하고 서면 붉은 화산재로 덮인 '붉은오름'과 바다 위 수직으로 솟구친 '선돌바위'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붉은오름은 섭지코지의 심장과도 같은 곳으로, 화산 분출 시 뿜어져 나온 '송이'가 겹겹이 쌓여 독특한 원색의 미를 뽐낸다.
 섭지코지의 심장, 붉은오름(왼쪽)과 용왕 아들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 선돌바위(오른쪽). 붉은 화산재와 검은 기둥이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 전갑남
그 발치에 선 선돌은 마치 바다에서 솟구쳐 오른 검은 기둥 같다. 이 바위에는 하늘로 올라간 선녀를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용왕 아들의 애달픈 전설이 서려 있어 유독 간절해 보인다. 바위 정상의 하얀 자국들은 가마우지들이 남긴 흔적이다. 물속 사냥을 마친 후 양 날갯죽지를 활짝 펴 몸을 말리는 그 정지된 동작마저 고요한 풍경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다.
아쉬움이 남는 길 그리고 하얀 등대
 섭지코지의 아름다운 길목, 성산일출봉과 마주하는 최적의 조망 지점에 자리 잡은 현대적인 건축물. 거친 해안선과 대비되는 인공의 벽이 못내 눈에 거슬린다.
ⓒ 전갑남
산책로를 따라 등대로 향하는 도중, 못내 아쉬운 장면과 마주한다. 시야를 가로막고 서 있는 건물 때문이다. 탁 트인 바다와 코뿔소를 닮은 성산의 장엄한 뷰를 가로막은 그 인공의 벽은 못내 눈에 거슬린다. 자연이 선물한 완벽한 화폭 위에 굳이 이런 건물이 들어서야 했을까. 하필 아름다운 길목에 건축물이 들어선 까닭이 무엇인지, 여행자의 시선에는 씁쓸한 물음표가 남는다.

그럼에도 붉은오름 정상에 오르면 하얀 '방두포등대'가 반긴다.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선명한 흰색 등대는 섭지코지 풍경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등대 곁에 서면 섭지코지의 전경이 다시금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거친 해안선과 끝없는 수평선, 그리고 그 사이를 묵묵히 밝히는 등대는 길 잃은 배들뿐만 아니라 여행자의 흐트러진 마음까지 평온하게 비춰주는 듯하다.

생명이 머무는 길목, 먼 인연의 확인

섭지코지는 단순히 경치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성산포 벌판은 드물게나마 저어새가 머물다 가는 생태의 길목이다. 우리가 사는 강화도 갯벌에서 여름내 부지런히 먹이사냥을 하던 그 저어새들을, 이곳 제주에서도 마주할 수 있을까? 막연한 생각에 수평선을 바라본다.

대다수의 저어새가 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났겠지만, 간혹 이곳 제주에 남아 겨울을 견디는 강인한 생명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강화도에서 온 여행자에게 묘한 동질감을 준다. 강화와 제주를 잇는 생명의 보이지 않는 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훈훈해진다.

용암이 흘러 굳어진 검은 현무암과 그 위에 층층이 쌓인 화산재 지층 단면은 제주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웅변한다. "여행은 아는 만큼 즐겁고, 제주는 아는 만큼 속살을 보여준다"는 말을 섭지코지는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또 다른 세상, 섭지코지에서의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붉은 낙조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섭지코지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울림으로 가득 찬다. 편안한 산책길에서 제주의 멋을 한껏 느낄 수 있다.
ⓒ 전갑남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제주를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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