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진호의 AI, 사람을 향하다] AI가 치매 환자의 기억을 도와줄 수 있을까?

홍석원 2026. 4. 8.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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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진호 목원대학교 겸임교수/인간 중심 AI 저자 
금진호 목원대학교 겸임교수/인간 중심 AI 저자 

어머니가 처음 딸의 이름을 잊던 날, 그 가족은 말문이 막혔다. 수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러온 이름이었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한 단어의 소멸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좌표가 사라지는 일이다.

치매는 그렇게, 기억이라는 집의 방 하나씩을 소리 없이 허문다. 오늘날 인공지능은 그 허물어지는 집 앞에 서 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진지하게. AI는 치매 환자의 기억을 도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기억이란 무엇이고 인간의 자아란 무엇인가를 묻는 인문학적 질문이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기억을 단순한 정보의 보관소로 보지 않았다. 그는 기억이란 과거와 현재의 자아를 잇는 서사라고 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나는 누구였고, 지금 누구이며, 앞으로 누가 될 것인가'를 끊임없이 구성한다. 치매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이 서사가 끊기기 때문이다. 기억의 상실은 곧 자아 서사의 해체이고, 환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로 속에 홀로 남겨진다.  

이 지점에서 AI의 역할을 생각해 볼 수 있다. AI는 외부 기억 장치로서 환자의 서사를 보존하고, 필요할 때 꺼내어 보여줄 수 있다. 사진과 영상, 목소리, 일상의 기록들을 학습한 AI가 "오늘은 손녀 지윤이의 생일이에요. 작년엔 함께 케이크를 만들었죠"라고 말해준다면, 그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끊어진 서사를 잠시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실제로 이런 시도는 이미 시작됐다. AI가 생성한 '기억 일기'를 통해 치매 환자의 인지 기능 저하 속도를 늦추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매일 아침 AI가 어제의 일과를 요약해 들려주고, 오래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눈다. 환자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보호자와의 대화가 늘었다는 보고가 나온다. 기술이 관계의 매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AI가 기억을 '대신'하는 것과 기억을 '함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AI가 기억을 완전히 대체하려 할 때, 우리는 위험한 경계를 넘는다. 환자의 서사를 AI가 재구성하고 주도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기억이 아니다. 기억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감정과 해석이 녹아든 살아있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첫 번째 여행과 딸이 기억하는 같은 여행은 세부 사항이 다르다. 바로 그 차이 속에 각자의 자아가 있다. AI가 정확하다는 이유로 그 차이를 균일하게 만들어버린다면, 오히려 기억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

반면 AI가 기억을 '함께'하는 동반자 역할에 머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환자가 스스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힌트를 주고, 반응해주고, 경청하는 존재. 완벽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라, 옆에서 "그때 참 좋았죠?"라고 말을 건네는 존재. 이것이라면 AI는 기억의 조력자로서 아름다운 역할을 할 수 있다. 

Gemini로 생성한 이미지.

영국의 한 요양원에서는 AI 스피커가 환자에게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노래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음악은 언어 기억보다 훨씬 오래 남는다는 뇌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중증 치매 환자도 자신이 좋아했던 노래가 나오면 표정이 밝아지고 손발을 움직인다.

AI는 이 순간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의 문을 두드릴 뿐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AI는 기억의 내용을 도울 수 있어도, 기억의 고통을 함께 감당하지는 못한다. 치매 환자의 가족이 겪는 가장 큰 슬픔은 기억 상실 자체가 아니라,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 곁에서 무기력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감각이다. 아무리 정교한 AI가 어머니의 과거를 기억해준다 해도, 어머니가 딸의 눈을 바라보며 "넌 누구냐"고 묻는 그 순간의 아픔을 기술이 덜어줄 수는 없다.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고통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AI를 치매 돌봄에 어떻게 위치시켜야 할까. 

첫째, AI는 가족과 돌봄 제공자를 '대신'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AI가 곁에 있다는 이유로 인간의 돌봄이 줄어든다면, 그것은 기술의 편리함이 관계의 온기를 잠식하는 일이다. AI는 돌봄의 보조 수단이지,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둘째, 환자의 존엄이 우선이다. AI가 수집하고 학습하는 기억의 데이터는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누가 그 데이터를 관리하고, 어떻게 활용하며, 언제 삭제할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원칙이 필요하다. 기억은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격 그 자체다.

셋째, AI 기술의 개발 방향이 '효율'이 아니라 '존엄'을 향해야 한다. 치매 환자의 증상을 얼마나 빠르게 진단하느냐보다, 환자가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를 느낄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울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AI가 치매 환자의 기억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렇다, 도울 수 있다. 잊혀가는 이름을 불러주고, 희미해지는 얼굴을 보여주고, 기억의 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려줄 수 있다. 하지만 AI는 기억을 '살게' 할 수는 없다. 기억이 살아있으려면, 그 기억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 손을 잡아줄 사람, 같은 노래를 듣고 같이 눈물 흘릴 사람.

기술은 우리에게 도구를 줄 수 있다. 그 도구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조건이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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