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요환 목사의 새벽묵상] 자기연민이라는 은밀한 감옥

외로움이나 수치심 같은 연약한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 밖으로 휘두르는 방어기제가 분노라면, 질문은 자연스레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밖으로 터지지 못한 분노가 안으로 굽고 굳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자기연민’이라는 차갑고 습한 그늘이 됩니다. 분노가 타인을 공격하는 뜨거운 불이라면, 자기연민은 나 자신을 서서히 질식시키는 곰팡이와 같습니다. 이 감정은 매우 은밀합니다. 그 안에서는 내가 나를 가엾게 여기며 “나는 잘못이 없어, 환경과 사람이 문제야”라는 가짜 위로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치명적입니다. 바로 영적 성장의 정지입니다.
심리학자 아론 벡(Aaron Beck)은 우리가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순간적으로 평가하는 ‘자동적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자기연민에 깊이 빠진 이는 “나는 항상 손해만 봐” “결국 아무도 나를 돕지 않아” 같은 부정적인 사고를 반복합니다. 이것이 강화되면 우리 영혼에는 ‘핵심 신념’이라는 견고한 창살이 세워집니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 채, ‘나는 영원한 피해자’라는 특수 안경을 쓰고 모든 상황을 왜곡해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노인 브룩스는 50년의 수감생활 끝에 가석방되지만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미친 것이 아니라 감옥에 ‘길들여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연민도 이와 같습니다. 상처에 길들여지면 그것이 곧 정체성이 됩니다. 상처가 나를 정의해주고, 타인의 동정적 관심을 끌어주며, 내 실패에 대한 완벽한 핑계가 되기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그 감옥의 문을 안에서 걸어 잠급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군대’가 아닌 ‘버려진 고아’로 정의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 누워 있던 병자가 등장합니다. 38년은 그의 정체성이 화석처럼 굳어 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치유의 주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의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주여, 사람이 없어 내가 못 갑니다.” 그는 눈앞의 구원자를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억울한 ‘피해자 서사’를 낭독합니다. 감옥 문이 열리기 직전인데도 여전히 창살을 붙들고 사람 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73편의 시인 역시 비슷한 위기를 겪습니다. 악인이 잘되는 현실을 보고 “내가 깨끗하게 산 것이 허사로다”(13절)라며 비교라는 창살에 갇힙니다. 자기연민에 빠지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삭제되고 내가 받은 상처만 확대됩니다. 고통은 사실일지라도, 그 해석은 과장되고 왜곡되어 오직 나의 아픔만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맙니다.
이 은밀한 감옥에서 나가는 길은 무엇일까요. 시편 73편의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깨달았다”(17절)고 고백합니다. 성소는 내 좁은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렌즈를 빌리는 곳입니다. 거기서 시인은 “하나님이 나를 괴롭히신다”는 탄식을 멈추고, “하늘과 땅 어디나 주님이 계시다”는 고백으로 전환합니다.
자기연민으로 길들여진 자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힘은 희망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확실한 희망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피해자 서사를 멈추게 하는 거룩한 마침표입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향해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병자’라는 낡은 이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로 살고 싶습니까. 과거의 상처와 무력감이라는 낡은 자리에 언제까지 누워 계시겠습니까. 십자가는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이제 인생의 노트를 펼쳐 자기연민으로 써 내려간 문장들을 지우십시오. 그리고 그 위에 주님이 주신 새 문장을 적으십시오. “나는 상처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녀다.” 감옥 문은 이미 열렸습니다. 당신은 이제 피해자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그 자리를 들고 일어나십시오.
(안산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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