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밖 이주 아동에 희망을… 청년 5인, 디지털 신분증 개발

박윤서,김용현 2026. 4.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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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느리고 그림자 아동은 자란다]
<상> 서류엔 없는 아이들 향한 긍휼
민사팀이 지난해 11월 스위스 제네바 챌린지에서 세계 114개팀 가운데 2위를 수상한 뒤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민사팀 제공


모태신앙인 유병준(27·아래 사진)씨는 초등학교 무렵부터 보육원 등지에서 봉사하며 성장했다. 유씨는 기독 NGO를 통한 해외 봉사와 이주아동 멘토링을 해왔지만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어려운 아이들을 더 돕지 못하는 현실이 늘 아쉬웠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며 지속적으로 도울 방법’에 대한 고민 끝에 그는 서울대 동료들과 함께 이주민들의 살아갈 권리를 보호할 실마리를 찾아냈다.


팀장인 유씨를 포함해 서울대 국제대학원(GSIS) 소속 4명과 사범대 1명으로 구성된 ‘민사(MINSA)’팀은 지난해 11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네바 챌린지에서 미등록이주아동을 위한 가명 디지털 신분증(MIN카드) 시스템을 제안해 세계 114개팀 가운데 2위를 차지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의 후원으로 각국 대학원생들이 글로벌 난제를 다루는 이 대회에서 한국팀이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팀 이름 ‘민사’는 ‘미등록이주아동들이 국민(民)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사랑하자’는 의미와 이주민 신원 보호 샌드박스(Migrant Identity Number SAndbox)의 약자를 동시에 담고 있다. 유 팀장은 “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팀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유 팀장은 최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한국인 정체성을 가진 이주아동들이 단속 공포 없이 병원과 학교에 갈 수 있게 돕고 싶었다”며 “서류에 없다는 이유로 지극히 작은 자가 배제되는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외면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팀원 조혜수(26)씨는 “부모가 국외 추방될 위협을 감수하지 않으면서도 시민사회의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보를 활용하면 아이의 기본권을 지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핵심 기술은 ‘영지식(零知識) 증명’이다. 영지식 증명(Zero-Knowledge Proof)은 증명자가 자신의 개인 정보나 비밀 지식을 공개하지 않고도 이를 알고 있음을 증명하는 암호 기법이다. 민사팀이 제작한 암호화된 방식의 MIN카드(그래픽 참조)를 아동이 병원 원무과에 제시하면 이름, 국적, 체류 신분과 같은 개인 정보는 병원에 노출되지 않는다. 대신 ‘이 아동이 특정 백신을 맞았는가’ 식의 해당 서비스를 받기 위한 최소한의 사실만을 ‘예/아니요’의 답변으로 알려준다.

이 기술이 필요한 이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태국 국적 칸야(가명·34)씨의 두 살 딸 사랑(가명)이는 대한민국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다. 3년 전 방문동거(F-1-5) 비자로 입국한 칸야씨는 한국인 남성과 아이를 가졌다. 출산 전 생부가 잠적하면서 사랑이의 한국 국적 취득 길은 막혔고 체류 비자도 만료됐다. 건강보험이 없어 감기 진료비로 10만원을 낼 때도 있다. 법무부의 임시 체류 구제 조치도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국내 출생 아동이라도 최소 6년 이상 체류해야 신청 요건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유 팀장이 말한 ‘작은 자’가 바로 이런 이들이다.

그림자 아동이라고 불리는 미등록이주아동은 2만명으로 추산된다. 법무부가 앞서 파악한 수치는 5089명으로, 경기도교육청이 자체 추정한 도내 재학생 수 6000명보다 적다. 체류 자격 취득에는 6년 이상의 체류 증명과 1인당 최대 3000만원의 범칙금 납부가 필요하다. 법무부가 감면 조치를 시행해 현재는 최대 270만원으로 낮아졌지만 아이가 성인이 되면 부모는 한국을 떠나야 한다. 절차적 까다로움과 경제적 부담이라는 장벽으로 실제 체류 자격을 얻은 아동은 1205명에 머물고 있다.

해외에서는 영지식 증명이 제도화되고 있다. 2015년 출범한 미국 뉴욕시의 시립 신분증(IDNYC)은 이민 지위와 무관하게 10세 이상 모든 시민에게 무료로 발급된다.

출범 1년 만에 73만명 이상이 신청했고, 이민 단속 기관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미등록이주민도 병원 진료, 은행계좌 개설, 경찰 신분 확인에 이 카드를 쓸 수 있다.

유럽연합은 2024년 5월 발효된 차세대 디지털 신분증 규정(eIDAS 2.0)에 영지식 증명 기술 도입을 명시했다. 개인정보를 다 드러내지 않고서도 특정 자격만 증명하는 원칙을 공식 제도로 채택한 것이다. 민사팀 프로젝트는 뉴욕의 포용적 신분증 개념에 유럽의 데이터 최소화 기술을 결합해 한국적 대안을 제시한 셈이다.

민사팀의 시스템이 현장에서 작동하려면 지방자치단체가 가명 디지털 신분증을 공공복지 체계 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아이의 신원을 확인해줄 신뢰 기반의 중간 플랫폼이 있어야 한다. 민사팀은 “교회의 관계망은 미등록이주아동을 위한 효과적 플랫폼이 될 수 있다”며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이 아이들 곁에 있었다”고 밝혔다.

미등록아동지원센터 대표 은희곤 목사는 “성경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께 한 것이라 말한다”며 “한국교회의 교육 건강 법률 등 인적 네트워크와 돌봄 생활 등 물적 자원을 제공해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강조했다. 최윤철 건국대 이주·사회통합연구소장은 “6년 이상 체류했을 때만 신청 요건을 갖춘다는 현행 임시등록 제도의 공백을 메워줄 수 있는 제도”라며 “경기도 시흥시에서는 미등록이주아동에게 ‘시흥아동확인증’을 발급해 의료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윤서 김용현 기자 pyun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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