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아버지 눈물에도…목욕탕집 수재, 미술 꺾지 않았다 [안혜리의 인생]
이진준 카이스트 교수 인터뷰

자취방 문을 열었더니 부모님이 서 계셨다. 수소문 끝에 서울대 앞 자취방을 찾아 1년 만에 아들 얼굴을 마주한 어머니는 문을 밀고 들어와 아들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놈 자식아. 안 보고 싶었나. 나 죽고 하지 그랬나. " 영화 '대부' 속 말론 브랜도 같은 큰 덩치로 문 앞에 버티고 선 아버지는 차분했다. 아니, 침울했다. "소주 한잔하자. " 그렇게 아버지에게 이끌려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소리쳤다.
" "준아야, 포기하지 마라. 아부지가 뭐라카든 니 하고 싶은 기 해라. " "
■
「 부모 절연에도 경영 아닌 미술 선택
남 기대 아닌 내 인생 살아야 했기에
내 리듬 내 호흡이 진정한 행복 줘
"때로 멈추고 숨 쉬고 지금 머물라"
」
그 무서운 가난 탓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한 아버지는 1등을 놓친 적 없는 수재 아들에게 대기업의 평범한 월급쟁이를 못내 바랐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면서도 아들을 잃을까 두려워 결정적 순간 이렇게 아들 편에 섰다. 어머니의 변심이 힘이 됐을까. 이날, 살면서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 앞에서도 그는 꺾이지 않았다. 덕분에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초청받는 미디어 예술가가 됐다. 이진준(52)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얘기다.
![영국 애슈몰린 박물관 큐레이터이자 옥스퍼드에 재직중인 셸라그 베인커 교수가 10m 길이 한지 두루마리 위에 쓴 이진준 교수의 박사논문을 검토하고 있다. 박물관은 5년 검토 끝에 꽤 고가를 주고 이 교수가 제작한 9개 중 1개를 사 영구 소장하기로 했다. [사진 KAIST]](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8/joongang/20260408001805458idaa.jpg)
그의 인생은 미술로 인생 경로를 급선회해 부모로부터 절연 당한 걸 비롯해 일탈의 연속이었다.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2001) 전 선배 7명과 함께 동영상 압축 기술로 온라인 광고하는 회사 세워 돈 좀 버는가 싶더니 지분 정리하고 뜬금없이 조소과에 편입했다. 졸업 후 지상파 다큐 PD 생활도 잠깐. 다시 조소과 대학원에 들어가 무려 4년 걸려 어렵게 석사(2009)가 됐다.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MBC 앞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랜드마크인 높이 12m 미디어 설치작품' THEY'를 선보이는 등 한 5년 한국에서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 지냈는데, 돌연 영국으로 떠나 세계 1위 예술 디자인 명문인 영국 왕립예술대학(RCA) 석사(2017), 옥스퍼드 러스킨 스쿨 순수미술 철학 박사(2020)를 땄다.
![2008년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조형물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2010년 완성한 높이 12m의 THEY. 작품 앞 검은 실루엣이 이진준 교수다. [사진 이진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8/joongang/20260408001806723iezm.jpg)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역사상 첫 아티스트 출신 전임교수 타이틀로 지난 2021년 떠들썩하게 귀국했던 이 교수가 최근 또 일을 냈다. 서구 지성사 핵심 연구 기관 중 하나인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 소장 작가가 된 것이다. 한국인으로선 당연히 처음이고, 생존 작가로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아직 확인된 바 없다.
안식년을 맞아 옥스퍼드 엑시터칼리지 방문교수와 뉴욕대 겸임교수, 도쿄예술대학교 방문연구원 타이틀로 전 세계를 다니며 활동하고 있는 그가 홍콩을 거쳐 막 서울로 출장 왔다기에 지난달 30일 늦은 밤에 만났다. 정신여고가 잠실 이전 전 교사(校舍)로 썼던 100년 넘은 붉은 벽돌 근대 오피스 빌딩(대호빌딩) 3층에 있는 종로 작업실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4시간 가까이 풀어낸 인생 이야기를 그의 시각에서 정리했다. 안혜리 논설위원
삶과 죽음
경영학과 나와 조소과로 방향 튼 내 이력을 알면 다들 묻는다. 결정하기 어렵지 않았냐고. 아니다. 쉬웠다. 너무 쉬웠다. 이번 생에 해야 할 숙제, 그러니까 안 하면 안 되는 꼭 가야 할 길이라 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지금껏 인생 변곡점마다 늘 그랬다. 살아본 사람 입장에선 무슨 대단한 선택이 아니라 그냥 산 거다.
![이진준 교수(왼쪽)와 아버지. [사진 이진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8/joongang/20260408001807980rebv.jpg)
하나는 선우회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1995년 입학하자마자 서울대 학생회관 식당에서 '나를 찾아서'라는 문구가 선명한 동아리 포스터를 마주쳤다. 96~97년 서울대 수학과 박사 과정부터 행시 합격자 등 9명이 무더기로 출가해 언론 조명을 받았던 바로 그 선우회 모집 포스터였다. 이때부터 선우회는 나를 살게 했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창업에서조차 그랬다.
공부에 별 흥미는 없었지만 졸업 전 뭔가 해보고 싶었다. 한 교수님이 "이젠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아닌 상(商)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에 혹해 고시촌 녹두거리에 살며 얻은 아이디어로 선배들과 광고회사(2000)를 차렸다. 메가스터디도 나오기 전 동영상 압축기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주목, 포털 다음과 계약해 10초짜리 동영상 배너 광고를 만들어 올렸다.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온갖 다툼이 생겼다. 내 편일 거라 여겼던 선배들이 투자자 편에 섰다. 허무했다. 비단 그 선배들만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다. 인생 목표를 잃어버린 충격으로 거의 실어증에 걸렸다.
그 무렵 관악산에 같이 올라 명상하던 동아리 회장(83학번 김형석·일묵스님)이 출가 후 편지를 보내왔다. "속세와 절이 다르지 않다. " 깨달았다. 이 형은 출가해야 하는 사람이었구나. 절 생활(聖·The Sacred)과 대학생활(俗·The Profane)이 다른 나는 출가하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그러곤 결정했다. 성도 속도 아닌 세계에 머무르기로. 당시엔 정확히 몰랐지만 그게 미술 작업이었다. 나를 살린 치유 과정이었다.
다른 하나는 폐결핵(죽음)이다. 고향 마산에 결핵요양원이 있었던 탓인지 태어나자마자 폐결핵에 걸려 9살까지 생사 고비를 넘나들며 투병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랐던 어릴 적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삶이 갑자기 끝날 수 있다는 느낌, 죽음은 늘 가까이 있었다. 지금도 밥 먹고 나가다 교통사고로 저 세상에 갈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삶의 매 순간 집중한다. 나중에 뭐가 되고 안 되고, 뭘 성취하고 말고를 따지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한다. 언제나 지금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까.
아버지와 아들
'THEY'로 주목받았을 때도 아버지는 내가 다른 직업을 할 거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같이 간 어머니한테 "이거 팔아 얼마 벌었나"를 물을 정도였다. 그랬던 아버지가 지난해 8월 서울 성북동 BB&M 갤러리 개인전에 나온 '샴페인 수퍼노바'란 작품 앞에서 무너졌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식은땀 흘리며 쓰러져 함께 간 삼촌(아버지 동생)이 서울대병원에 모셔가야 했다. 난 아직 이유를 모른다.
![지난해 8월 서울 BB&M갤러리 개인전에 선보인 '샴페인 슈퍼노바'. 홍채를 이용한 작품인데, 큰 스크린 위에서 빛이 여러 형태를 띠며 돌아간다. 당시 테이트 모던 프란시스 모리스 관장도 찾았다. 이 작품을 본 아버지는 몸을 못 가눌만큼 큰 충격을 받으셨다. [사진 이진준]](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8/joongang/20260408001809228qbqm.jpg)
"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지 니 아나. " " 하필 마산에서 아들 찾아 서울 올라오는 어느 휴게소엔 좌판 깔고 1만~2만원에 그림 파는 가난한 무명작가가 있었다. "전국 몇 등 하던 내 아들이 와 이런 걸 하노. " 부모님은 아들을 만나기도 전부터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당신 아버지(할아버지)를 15살에 여의고 4남 1녀 장남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에겐 가난이 이런 거였다. 몸 쓰는 일 하다 어렵게 마련한 목욕탕도 풍요를 주진 않았다. 가난도 무서운데, 아들이 하겠다는 건 당신들이 전혀 모르는 세계였다. 그들 입장에선 아들이 미지의 세계로 사라져 죽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정말 너무 무서워서, 허락할 수가 없던 거다. 여전히 그 세계를 이해할 순 없지만 아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걸 마주하곤 "그때 왜 몰랐을까" 싶어 충격받았던 걸까.
아버지 사과에 답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고.
" "가난이 진짜 무서우셨던 거 알아요. 누구라도, 아니 나라도 당연히 반대했을 거예요. " " 부모와 절연하면서까지 들어간 세계인데, 그 세계도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 주진 않았다. 서울대 서양화과 석사 과정 진입 실패는 양반이었다. 조소과 편입해 학부 마치고 들어간 조소과 석사 과정에선 아예 내 작업을 통째로 부정당했다.
![옥스퍼드 박사 과정 당시 무리해서 다리를 다쳤다. 이때 몸 움직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고, 그게 10m 길이 한지 두루마리 논문으로 이어졌다.논문 내용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예술학회 종신 회원이 됐고, 두루마리 형식 덕분에 애슈몰린이 소장을 결정했다. [사진 이진준]](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08/joongang/20260408001810504pesu.jpg)
" "이건 조각이 아니야. " " 1학기 한 번만 볼 수 있는 논문 자격시험은 세 번이나 떨어졌다. 한 교수님이 미디어아트 말고 전통적 조각으로 바꿔오라고 했다. 난 바꾸지 않았다. 매번 같은 스타일 미디어아트로 심사받고 떨어졌다. 결국 그 교수가 정년퇴임한 후에야 통과됐다. 그 어렵다는 옥스퍼드 박사를 2년 반에 마쳤는데, 서울대 석사에 4년이나 걸린 이유다. 침 뱉고 나가버렸다면 아마 국내 조각계가 끝내 날 인정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이 과정 덕분에 나와 대척점의 세계가 뭔지 명확하게 확인하고 내가 선 지점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자유로워졌다.
지금도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행복한가." 다른 말로 하자면, "내 리듬대로 내 호흡대로 살고 있는가. " 2007년, 2010년생 내 두 아이를 위해 2024년 초부터 책(『49』)을 쓰고 있다. 이 책은 애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문장으로 맺는다.
" "Stop, breathe, and be(멈춰서, 숨 쉬고, 지금 머물러라)." " 쓰고 보니 나, 그리고 모든 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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