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과잉 시대… 전통 끄집어내 세상 꼬집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9년 만에 개인전 '안구선사'를 하며 회화 작업을 잔뜩 내놓은 박찬경(61) 작가를 최근 갤러리에서 만났다. 전시장에 걸린 것은 거의 전부 회화였다. 그래서 "왜 회화로 돌아왔냐"고 했더니 "돌아온 게 아니라 막 시작한 것"이라고 정정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그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하지만 미국으로 유학 가 사진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한 30여년 내내 사진과 영상을 중심으로 작업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영화감독 박찬욱이다. 형이 만든 영화 ‘JSA 공동경비구역’을 패러디한 영상 작업 ‘격세지감’을 형과 함께 만들기도 했다. 영상 작품 ‘소년병’은 사진을 이어 붙여 영상처럼 만든 작업이었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인 남북 문제는 박찬경 예술 주제의 한 축이었다.
또 다른 축은 우리 전통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차의 지원을 받아 중견 작가에게 개인전을 열어주는 ‘현대차 시리즈 2019’ 작가에 선정됐을 때 선보인 개인전 ‘마당’은 회랑, 마당, 처마, 주련 등 전통 가옥의 형식을 전시 디스플레이에 도입했다. 출품한 작품도 전통 병풍 그림을 찍은 사진, 벽화를 찍은 사진 등을 내놓았지 스스로 붓질을 해서 그린 그림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회화를 시작한 이유는 뭘까. 그는 “과거에는 모두 회화와 조각을 했기 때문에 미디어가 새로운 것이었다. 회화라는 전통적인 매체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나 있을까 회의했다. 요즘은 정반대 상황이 됐다. 눈만 뜨면 영상, 무빙 이미지, 사진이 넘쳐난다. 회의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라. 지금처럼 모두가 미디어에 중독된 사회에서는 회화가 다른 여지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미대 나온 사람들에게 회화는 기본이자 고향 같은 곳”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전시장에 나온 작품 중에는 답사를 가는 작가 일행을 담은 게 있는데, 아마추어가 그린 것처럼 의도한 듯 솜씨가 없다. 그는 “일부러 못 그린 게 아니라 진짜 못 그린 거다. 하하. 2023년에 처음 회화를 시작하며 그린 것”이라며 “그때 하고 싶었던 건 ‘정직한 그림’이었다. 정직하다는 게 뭘까. 유화의 발전된 기교, 즉 입체감, 투시도 없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작 회화 전반에는 한국성이 지하수처럼 흐른다. 소재는 중국의 송대 회화, 조선시대 회화, 전통 종교 등에 기댔다. 동양화의 주요 소재인 괴석, 폭포, 노송을 서구 미술의 삼면화처럼 족자 형태로 그린 ‘족자’ 연작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만화적으로 캐릭터화한 듯 각각의 그림에서 조선 말기 정학교의 괴석도,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와 ‘노송도’가 떠오른다.
“겸재 정선이나 몽인 정학교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들은 왜 괴석을, 노송을 좋아했을까, 그 취미는 어디서 연유했던 것일까 궁금했어요.”
조선 말기 괴석도의 유행이 여성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기이한 형상 탓에 다산을 염원한 마음에서 온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그는 “그건 나중에 붙여진 상징체계이며 원래 북송대 (서예가·화가인) 미불에 따르면 괴석은 그 안에 굉장히 긴 시간을 담고 있고, 그 결과로 생긴 형상의 기이함이 높이 평가받는다. 그 기이함이라는 게 우주의 오묘함과 노장 사상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기이한 돌, 물이 흐르는 폭포, 뒤틀린 노송 등을 인간 중심주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을 보여주는 도상으로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는 “기후위기, 중동 전쟁 등에서 보듯이 지금은 인간이 세계를 망치고 있다. 근대적인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가 얼마나 많은 것을 파괴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성찰이 있다. 그런데 포스트 휴머니즘을 강령처럼 제시하기보다 우리 문화 속에 쌓여 있는 것에서 찾아 이미지로 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프로젝션’ 연작은 나아가 작가의 정체성과 상관이 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괴석 위에 뽑혀진 눈알이 얹혀 있다. 그 눈알에서 광채가 흘러나오며 주변의 기암괴석을 비추는 풍경은 기이하다. 눈은 시각 예술을 다루는 화가의 상징 아닌가. 그 눈알을 뺐다는 것은 시각 중심주의에 대한 반성, 혹은 화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등 다층적으로 읽힌다.
창작이란 뭘까. 그는 “저 그림들은 저 자신만의 독창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현대미술이 기발한 아이디어 경쟁으로 가고 있지만 저는 경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 우리한테 이미 많은 (문화적) 자산들이 있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 지금의 언어로 새롭게 할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면서 이번 회화 작업이 우리 전통을 다시 보는 미술계 문화를 살려내는 데 일조하기를 기대한다며 인터뷰를 맺었다. 5월 10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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