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마음 읽기] 소설이 보여주는 생각의 터전

문학은 노력한다. 역사처럼 문학도 당대의 사건을 쫓아가지만, 속도는 한발 뒤처진다. 그 속성상 직선으로 가는 언어를 신뢰한 적이 없고, 에두르는 언어 속에서만 진실에 가닿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묵히는 와중에 문학은 어떤 사안들을 다면적으로 들여다본다. 최근에 출간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결정적 순간’(『근접한 세계』에 수록)은 ‘사회 문제에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단면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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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가의 몰락 다룬 일본 소설
도덕 넘어서는 소설의 품 일깨워
삶의 진실은 언제나 애매한 것
」

여든쯤 된 한 남성 사진가가 코로나19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그의 사진을 연구하고 생전에 인터뷰도 했던 큐레이터 미즈마키는 회고전을 준비한다. 작가의 집에서 자료를 수집하던 중 미즈마키는 어떤 상자를 열었는데, 거기서 열두 살쯤 된 소년이 나체로 여러 포즈를 취한 사진들을 발견한다. 이것은 개인적인 소장품이지만 이로써 사진가는 소아성애자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고, 전시회 개최 여부를 놓고 온갖 논쟁이 벌어진다. 소설은 핍진성을 위해 도록 교정지 내용 발췌, 이메일 인용, 플라톤의 『향연』 해석, 미술사의 다양한 논쟁과 아카이브 자료 동원 등 강력한 장치들을 설득력 있게 삽입했다.
작가를 존경하며 연구했다가 전시회를 취소해야 하는 큐레이터로 성범죄 문제의식이 첨예한 젊은 여성을 내세운 점, 이를 논픽션이 아닌 소설로 다룬 점은 이 주제를 취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로 여겨진다. 미즈마키는 사진작가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본인 역시 유부남과 불륜 관계인 처지라 인간에게는 누구나 떳떳하지 못한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만약 전시를 취소한다면 ‘예술가에게 성인군자 같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란 반론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이 작가의 명예가 실추되면 미즈마키 자신의 연구도 휴짓조각이 될 것이다.
히라노는 소설 속에서 여러 관계자에게 전시회를 둘러싼 의견 개진의 기회를 주는데, 그중 미술사가 니시하라의 메일이 눈길을 끈다. 그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일탈적으로 보여도 “예술계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바로 그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성 때문에 그것들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며 역사 속 유사한 사례들을 들어 찬반 입장을 정밀하게 검토한다. 이런 소설의 전개는 히라노가 사생활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와 영구적 속성을 띠려는 작품 사이에서 빠르게 정답을 내리지 않고 좀 더 복잡미묘한 마음들을 측정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나는 출판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실용적 입장에서 선 긋기를 해왔다. 대체로 피해자에게 동조하기에 입장을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관습이나 이념이 포괄하지 못하는 것들을 방치한 채 피해자 편에 서겠다고 간단히 입장을 정한 것은 어떤 면에서 지적 태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내 무의식은 종종 다른 것을 드러낸다. 자다가 한밤중에 깰 때 떠오르는 건 윤리적 논란에 휘말려 지면에 더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작가들이다. 수년 전 함께 작업할 때 작가 A는 마지막 교정지에 아기자기한 기억들을 삽입했는데, 그 세부가 무척 신선했다. 상투성이 거의 없던 그의 삶의 태도에서 받은 인상 또한 선명하지만 그는 더 이상 글을 발표하지 못한다. 지적 유희를 발랄하게 구사하는 작가 B 또한 지면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소설은 인간을 말살하지 않으려는 폭넓은 생각의 터전임을 히라노의 소설이 입증하고 있다. 여러 입장을 따지면서 가해와 피해가 뒤섞인 인물들을 보여주며 정답을 내놓지 않는 문학은 사회과학의 논리와 이념에서 벗어나 인생에 좀 더 다가서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행동하는 세계가 아니며, 진실은 언제나 ‘애매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여러 다른 관점을 첨가함으로써 종합적 시각을 향해 내달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던 때에 황석희 번역가의 성범죄 의혹이 보도됐다. 유독 표절, 도용, 대필, 미투 사건이 많이 발생하는 문학계에서 오랜만에 한 소설이 시간을 늘이면서 진실과 삶은 모호한 것이라는 목소리를 내려던 순간이었다. 이때 현실에서는 또다시 그것을 지울 만큼 강력한 사회적 사건이 드러났지만, 문학이 밤을 새우며 스스로를 깨우는 가운데 결자해지의 모습을 보여주길 고대한다.
이은혜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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