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서 행복하라”…‘길 내는 여자’ 서명숙, 하늘길 떠나다

손민호 2026. 4. 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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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7일 별세했다. 손민호 기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7일 별세했다. 68세. 고향 제주도에 올레길을 내 세상에 치유와 위로의 메시지를 몸소 전파했던 주인공이 막상 제 몸에 슨 병은 몰랐나 보다. 고인은 10년쯤 전 위암 판정을 받았었다. 술·담배 독하게 끊고 부지런히 걸어 완치한 줄 알았는데, 암세포는 주인 몰래 폐로 옮겨가고 있었다. 고인이 옆구리가 아프다며 병원을 찾아간 건 채 20일이 안 된다. 이미 늑막에 물이 차 손을 쓸 수 없을 때였다. 이날 서귀포 자구리 해안에는 파도가 유난히 들이쳤다.


서귀포 소녀 ‘맹숙이’


제주도 서귀포 자구리 해안. 소녀 서명숙이 뛰어놀던 곳으로 제주올레 6코스가 지난다. 손민호 기자
한라산 남쪽 자락 서귀포에서 태어난 서명숙의 아버지가 국토 최북단 백두산 기슭의 국경도시 무산 출신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민군 탈영병이었던 아버지는 제주도까지 흘러들어와 어머니를 만났고, 함경도 남자와 제주도 여자는 명숙·동철·동성 1녀2남을 두 살 터울로 낳았다.

소녀 ‘맹숙이’는 잘살았다. 어머니가 서귀포 매일시장(현재 매일올레시장)에서 ‘명숙상회’라는 제법 큰 잡화점을 했다. 그 시절 맹숙이가 나가서 놀던 데가 자구리·외돌개 같은 서귀포 해안이다. 지금의 제주올레 6, 7코스가 고스란히 맹숙이의 추억을 안고 있다. 외돌개 가기 전 ‘폭풍의 언덕’이라고 이름 지은 갯바위는 맹숙이가 어머니에 혼났을 때 혼자 울던 자리다.

제주올레 9코스를 걷고 있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손민호 기자

서귀포 소녀가 세상에 눈을 뜬 건 서울의 대학으로 진학하고 나서다. 고려대 교육학과 76학번인 그는 72학번 선배와 자취방을 함께 쓴다. 그 선배가 ‘영초 언니’ 천영초(72)씨다. 서명숙은 영초 언니로부터 소위 ‘의식화 교육’을 받았고, 79년 시국사건으로 구속돼 236일간 옥살이를 했다. 사건 주동자가 영초 언니였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영초언니(2017)』는 서명숙이 쓴 책 중에서 제일 많이 팔렸다.

대학을 졸업한 뒤 서명숙은 여러 잡지를 거쳐 시사잡지 ‘시사저널(현재 ‘시사인’)’에 입사한다. 여기에서 그는 국내 시사지 최초로 여성 정치부장과 편집장을 역임한다. 그 시절 회사 동료가 소설가 김훈, 시인 이문재다. 김훈은 서명숙을 “말 안 듣는 후배”로 기억하고, 서명숙은 김훈을 “날 아꼈던 선배”로 기억한다. 정치부 기자 서명숙은 『흡연 여성 잔혹사(2004)』라는 책을 냈을 정도로 이름난 골초였다.


길 내는 여자


제주올레는 일본과 몽골에도 수출됐다. 규슈올레 기차역에 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손민호 기자
2006년 9월, 쉰 살 생일을 한 달여 앞둔 날. 서명숙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스페인으로 날아간다. 걷기를 좋아해서 걸으러 여행을 떠난 건 아니었다. 이제야 털어놓지만, ‘길 내는 여자’ 서명숙은 악명 높은 길치였다. 제 고향 서귀포에서도 집을 못 찾아 길을 묻고 살았다.

이른바 ‘인생 2부작’을 결행한 건, 독하고 강한 정치부 여기자 서명숙에게도 ‘번아웃’이 왔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자신을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몸은 망가졌고 영혼은 춥고 쓸쓸했다”고 기억한다. 그는 23년간의 기자 생활을 모질게 끊고, 800㎞가 넘는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에 도전한다. 그리고 순례가 거의 끝날 무렵 결심한다. 고향 제주도에 내려가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아름다운 길을 만들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간 서명숙은 본격적으로 길을 낼 궁리를 한다. 두 남동생이 길 탐사에 투입됐고, 서울에서 내려간 지원군도 있었다. ‘시사저널’ 시절 눈여겨봤던 ‘똘똘한’ 후배 안은주(56·현 제주올레 대표)를 비롯한 여자 셋이 서명숙과 함께 한집에서 살며 국내 최초의 트레일(걷기여행길) 조성사업을 도모한다.

제주올레 1코스 말미오름에서 내려다본 올레길. 손민호 기자

2007년 9월 마침내 제주올레 1코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5년 뒤인 2012년 11월 제주도를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제주도 둘레길’이 완성됐다. 당시 제주올레는 26개 코스 422㎞였는데, 2022년 18-2코스가 추가돼 현재는 27개 코스 437㎞다.

사연도 많았고 곡절도 많았다. 제주올레는 입장료 수입이 없다. 하여 늘 허덕였다. 마땅한 사무실이 없어 초창기에는 여러 번 이사를 해야 했다. 2012년에는 한 여성이 올레길에서 변을 당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때 서명숙은 “여자인 내가, 여자가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었다”며 한참을 오열했다.


사람의 속도


제주올레는 최대한 옛길을 살려 조성했다. 그래서 흙길이 많고 구불길도 많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길 이름 ‘올레’는 골목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지금은 이 제주 사투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올레가 표준어처럼 쓰인다는 건, 제주올레가 그만큼 성공했다는 뜻이다.

제주올레 이후 전국에 걷기여행 열풍이 불었고, 제주도 여행 판도가 바뀌었다. 제주도 전통시장이 관광객으로 미어터졌고, 동네 멸치국숫집이 줄 서야 먹는 맛집으로 등극했다. 시장 상인의 딸이었던 서명숙은 “올레길은 무조건 마을에서 시작해 마을에서 끝나야 하고 시장이 있으면 꼭 들러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올레꾼이 길을 걸을수록 제주도는 넓어졌고, 관광객이 제주도에 체류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올레 열풍 이후 제주 이민 열풍이 분 건 우연이 아니다.

2025년 현재 제주올레를 한 번이라도 걸은 사람은 1300만명이 넘고, 해마다 4500명이 넘는 완주자가 탄생한다. 제주올레로 인한 생산 유발 효과는 매년 1조2000억원에 달한다(제주연구원). 제주올레는 수출도 됐다. 일본에 규슈올레와 미야기올레를, 몽골에는 몽골올레를 조성했다.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공동 완주 인증제를 시행하고 있다. 두 길을 각 100km 이상 걸으면 공동 완주증을 준다.

제주올레 10코스 섯알오름 근처에서 휴식 중인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이사장은 "올레길은 절대 빨리 걸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손민호 기자

제주올레의 성과보다 중요한 건 제주올레가 일깨워준 사람의 속도다. 언제부터인가 길은 자동차의 전유물이 되었다. 자동차에 빼앗겼던 길을 올레가 되찾아줬다. ‘놀멍 쉬멍 걸으멍’은 고인이 누누이 강조했던 ‘올레 스피릿(Olle Spirit)’이다. “제발 천천히 걸으라”고 했던 당신이 마지막 가는 길은 왜 이리 서둘렀는지. 별안간 병세가 악화한 뒤 그는 안은주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서울에서도 암은 내 몸에 있었던 것 같아. 20년을 건강하게 산 건 열심히 걸었기 때문이고. 올레길에서 행복해라.”

빈소는 서귀포의료원 장례식장, 발인은 10일 오전 8시 30분. 10일 오전 9시 서북공원 잔디광장에서 영결식이 엄수된다. 서귀포 소녀 맹숙이가 뛰어놀던 곳이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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