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난 다음에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읽어도 절박한 호소문
[전태경 기자]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2026년 3월 출간)의 주인공 아흔세 살 강순희 여사의 아침은 요가로 시작된다. 몸을 정갈히 가다듬으며 그녀는 소원을 빈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지금까지 내 삶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평온한 미소 뒤에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잔혹한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다. 1975년 4월 9일 새벽.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만에 8명의 무고한 시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른바 '사법살인'이다. 스위스 국제법학자협회(ICJ)가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로 명명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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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책표지 |
| ⓒ 도서출판 은빛 |
2차 사건 당시 당국은 고문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유가족 동의도 없이 시신을 탈취해 화장해버리는 비겁함을 보였다. 하지만 가족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죽이고 난 다음에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라는 그 절박한 호소문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들은 살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살고 싶습니다. 저희들은 10년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작된 인혁당에 묶여 사형선고를 받은 피고인들의 아내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인혁당을 조작하여 북괴에 이롭게 하는 것을 '무슨 법, 무슨 조'에 해당하든지 만천하에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부디 저희들의 남편을 정치 제물로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이름 없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정치 제물로 삼는다면 그 제물 위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이 피더라도 향기 없는 꽃이요, 빛깔 없는 꽃이요, 생명력이 없는 꽃일 것입니다.' (1974년 12월 9일)
권력은 남편 우홍선의 이름을 '빨갱이'라는 차가운 낙인 속에 가두려 했지만, 강순희에게 그는 누구보다 다정한 연인이었다. 부산 범어사에서의 첫 데이트, 비 오는 날 처마 밑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불렀던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은 46년의 세월을 버티게 한 사랑의 연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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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사진 결혼 13주년을 맞아 강순희, 우홍선이 자녀들과 가족사진을 찍었다. |
| ⓒ 도서출판 은빛 |
그녀는 직접 도서관을 뒤지며 남편의 무죄를 입증할 근거를 찾아낸 전략가였고, 진실을 외면하는 기자들을 꾸짖던 투사였다. 강순희 여사의 90년 인생이 비극을 넘어 사랑의 역사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곁을 지켰던 수많은 일상적 연대 덕분이다.
조지 오글 목사, 프라이스 신부, 지정환 신부 등 이방인의 눈으로 한국의 비극을 목격했던 종교인들의 헌신은 거창한 이념보다 강력했다. 이런 끈질긴 마음들이 모여 결국 사형 집행 32년 만에 재심 무죄 판결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오늘의 강순희를 나는 철학자로 여긴다. 인생과 세상사에 대한 세부 정보를 거듭거듭 잃으면서도 삶의 큰 원칙은 더 확고하게 다져 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철학자 말고 어떤 단어를 쓰겠는가.…나도 아흔세 살까지 산다면 '아흔세 살의 강순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18시간의 사법살인은 한 가족의 삶을 파괴하려 했지만, 끝내 강순희 여사의 삶까지 훼손하지는 못했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라는 그녀의 고백은 가해자가 강요한 피해자라는 틀을 거부하고, 스스로 자기 삶을 '행복'이라고 정의 내린 위대한 승전보이다.
그녀에게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극복해낸 자만이 누리는 자부심이다. 구십 평생을 관통하는 그녀의 역사가 나에게 물었다. 거대한 악 앞에서 증오를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비극을 넘어 사랑으로 완성된 이 기록은, 고통스러운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고민할 많은 이들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다.
유시민: 사람들이 우 선생님과 인혁당 사건을 어떻게 알고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강순희: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이런 노래 가사가 있어요. 이북에서 학교 다닐 때 배웠어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 투사들이 불렀던 노래라는데, 이 노래처럼 그 사람들 몸은 죽었지만 꿈은 살아있어요. 그걸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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