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이름을 댔나?" 서로 등 돌린 이웃 사람들

황인욱 2026. 4. 7.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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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사북, 늦은 메아리] 허위진술 강요와 빨갱이 낙인... 국가 폭력이 붕괴시킨 마을 공동체

특별기획 '1980 사북, 늦은 메아리'는 박봉남 감독의 영화 <1980 사북> 전국 상영을 계기로 공론화한 사북 사건을 단지 과거사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의 대응, 공동체와 시민 사회의 변화 과정을 추적 기록해 국가 폭력의 기억과 치유 과정을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황인욱]

국가폭력은 피해자 개인의 몸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허위진술 강요와 고발, 낙인을 통해 가족, 친구, 이웃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고, 서로 반목하게 하는 가운데 공동체를 파괴한다.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회복 불가능한 상처 속에 갇힌 채로 방치된다. 국가폭력은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다.

사북사건 전담 합수부의 임시조사실은 길고 어두운 국가폭력의 시작점으로서 가장 야만적인 표본이었다.
▲ 사북 안경다리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국가폭력은 길고도 어두운 터널이며 많은 피해자들은 아직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사북의 안경다리.
ⓒ 엣나인필름
동네 아주머니들 앞에서 학대 당한 아저씨들

임시조사실의 집단 고문을 보안대원들이 주도했다면, 유치장의 가혹행위는 정복 차림의 경찰들이 주도했다. 한바탕 고문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유치장으로 돌아오면 수감자들을 향한 학대와 희롱이 이어졌다. 경찰들은 유치장 안으로 들어와 "순경 죽인 새끼들"이라고 욕설을 하며 마치 포로에게 화풀이를 하듯 군홧발로 걷어찼다.

당시 합동수사단 임시조사실에서 취조를 받던 광부들이 칸막이 너머 이웃 아주머니들이 능욕 당하는 모습을 보고 들었다면, 광부들과 함께 정선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부녀자들은 동네 아저씨들이 희롱 당하고 학대 당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깜빵 창살에다 발 걸어!" "발 걸어!" 해놓고 개 패듯 패는데 옆 방에서 들으믄 진짜 몸이 소름이 오싹오싹 돋을 정도로 그냥 개 패듯 패는 거여." (이명득, 2008년 증언)

유치장을 감시하던 경찰은 광부들을 마치 원숭이처럼 철창에 매달리게 한 다음, 굴욕적인 자세로 이리저리 오가게 만드는 '철창 타기'를 시키며 놀렸다.
그거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짓을 했단 말이야. 그 XX들이. 여자고 남자고 구분이 없어. 그건 완전 짐승 갖고 놀 듯 갖고 논 거야. (이원갑, 2020년 4월 증언)

유치장에서 남성 광부를 상대로 한 희롱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수감자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자행된 노골적인 학대 행위였다. 사북사건 피해자로 고문 당하고 풀려났던 박대성은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유치장 간수 정한식 순경이 '너희들 중 물건이 큰 놈에게 담배를 한 대 주겠다'며 남자들 하의를 벗게 하고 60cm 정도 나무 회초리로 철창 밖으로 나온 성기를 때리며 '이놈은 왜 이렇게 작아' 라는 등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습니다.(박대성, 2006년 증언)

정 순경은 그 전에 사북지서에도 근무했기 때문에 박대성과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당시 동원탄좌 광부였던 정인교도 그의 학대 행위를 기억했다.
끌려온 아줌마들에게 '그 짓을 안 하니 근질근질하지. 내가 대신해줄까' 하는 등 욕설을 하고 남자들 성기를 내놓게 하고 수치심을 주었습니다. (정인교, 2006년 8월 증언, <사북항쟁과 국가폭력>, 지식공작소, 2021)

사북사건 피해자 윤병천도 바로 옆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정 순경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는 사람에게 당한다는 그 사실이 더 절망스러웠다.
그래도 뭐라고 말해. '야, 니 나 아니까 때리지마' 이렇게? 아니잖아. 그런 말을 해도 되지도 않을 거고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낫지. 저 XX는 인간이 아니라는 거밖에 생각이 안 나지. (윤병천, 2020년 9월 증언)

사건 당시 동원탄좌 1050갱 후산부였던 안재도 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떨 때는 누워서 그 생각을 해요. 이 새끼 어디 사는지 한번 만나보고 싶다. 죽이고 싶은 거예요. (중략) 그놈의 XX가 우리 원주에서 군 재판할 때 증인으로 왔더라고. "전혀 손댄 사실도 없고 아주 밥도 잘 챙겨주고…" 에라이. 재판 와중에 뭐라고 말도 못 하겠고 미치겠더라고요. (안재, 2020년 증언)

윤병천과 안재에게 정한식은 알고 지내던 동네 사람이었지만, 사북 사건 이후에는 평생을 두고 저주하는 원수가 되어 있었다.

빨갱이 몰이와 이웃의 손가락질

1980년 4월 사태 수습을 위해 광부 대표, 광업소 대표, 강원도, 강원도 경찰국이 참여한 노사정 합의가 있었지만, 강원도경과 계엄 합수단은 이 합의를 배반하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시작했다.

선동자로 분류되어 1차 용의자 검거 명단에 오른 전효덕은 연행 후 이틀 동안 집중적으로 '간첩' 관련 조사만 받았다. 수사관은 친척 중에 6.25 때 인민군 유격대장이 있다는 내사 내용을 들이밀며 갑자기 "북한에 넘어 갔다 왔냐"고 추궁했다. 옆 칸에서 조사를 받던 안재는 전효덕이 취조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 양반이 고문을 심하게 받았는지 콱콱 고함을 지르더라고. 얼마나 아프면 고함을 지르겠어. "나는 북한 가는 길도 몰라요" 북한 가는 길도 모르고 그런데 왜 이렇게 패냐고… 나는 맞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우스운 거야. 북한 가는 길도 모른다, 이 소리를 들으니까 (안재, 2020년 증언)

당시 강원도 경찰국 정보2과 분실에서 작성한 '사북 광업소 소요사태 관련자 신원 파악 상황보고' 문건에는 '중점수사계획'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여기에는 "가. 고첩(고정간첩) 및 불순분자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인지, 나. 주동자의 과학적 사회주의 건설 및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등을 표방한 자생 조직에 의한 것인지, 다. 아니면 순수한 종업원의 권익과 대우 개선을 위한 것인지의 여부를 수사 규명코자 함"이라고 적혀 있다.

4월 17일 서울 광산노조 농성에 참여했던 전남 화순 출신의 광부 구정우는 '모의자'로 분류되어 연행되었다. 수사관들은 "김대중이 다 포섭해서 서울 광노에 올라간 것 아니냐"고 다그쳤다.

김대중이가 해 가지고 이거 사북항쟁 이거 일으켰지 않냐. 그 이야기에 또 조사하다가 안 되면 "전라도 너 이 ×× 빨갱이니까 너는 불어야 한다"고. "고문 안 시킬라니까 불어야, 빨리. 그러면 고문 안 시킬라니까 집에 보내줄 거니까". "내가 그런 분을, 내가 언제 보지도 못한 분을 내가 어떻게 만나 가지고 이런 항쟁을 일으키고 지령을 받았겠냐." (구정우, 2020년 증언)

당시 합동수사단에서 광부와 부녀자들을 조사 과정에서 대공 특이점을 확인한다는 구실로 무차별 고문과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폭행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경찰관의 진술과 다수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03. 진실화해위원회 제5차 보고서>, 200쪽).

수사관들은 사북 광부들을 "간첩보다 더한 놈들"이라고 비난하고 낙인 찍은 후, 재고문 협박으로 입을 막았다. 끌려가지 않은 동네 사람들은 끌려간 사람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듯 잡혀간 사람들을 향해 '빨갱이들'이라고 수군거렸다.

잔혹한 국가폭력에 압도 당한 채로 풀려 나온 사람들은, 경찰이 아닌 이웃에게도 '빨갱이'로 몰리는 신세가 되어 직장을 잃고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도 수십 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웃 고발 강요로 공동체를 파괴한 국가

사북사건 국가폭력의 가장 큰 해악은 선량한 지역 공동체를 붕괴시킨 일이다. 국가가 공무원들을 동원해 광부들과 주민들에게 고문과 폭력을 가해서 동료와 이웃을 고발하게 함으로써, 수십 년 동안 서로 반목 하거나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게 하고 그 사람과 대질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유치장에 있다가도 조사실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하면 나가서 그 사람과 대질을 하거나, 그 사람이 이야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따로 조사를 받았다.

하루 다섯 여섯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니까요. 딴 사람이 와서 딴 사람이 또 불러오잖아, 딴 사람이 뭔 얘기하면 또 나가는 거야. 날 불렀잖아. 나 지명했다 이거야 누가. 어쩔 땐 대질신문하고 이 사람 얘기만 듣고 나만 불러 또 가서, "이 ×× 저 사람이 그러는 데 니가 했다는데 왜 안 했다 그러냐" 이렇게 하고. (윤병천, 2020년 진실의 힘 증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면, 그 사람을 잡아 와서 그 혐의를 인정할 때까지 고문하고 고문 후 상호 자백을 근거로 혐의가 확정되었다.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 엣나인필름
760갱에서 후산부로 일하던 신천수는 1차 검거 작전으로부터 일주일 지난 5월 13일 저녁에 연행되었다. 수사관은 신천수를 끌고 오자마자, 게시판 앞에서 찍힌 사진을 내놓고 '지부장 부인 린치' 사실을 인정하라고 협박했다. 탄광에서 사용하는 대꼬(쇠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바닥에 닿을 정도로 눌렀다.

3일 후, 수사관은 먼저 잡혀 온 760갱 동료 신현이가 신천수를 지목했다면서 대질을 시켰다. 조사실로 온 신현이가 신천수를 보고 진술을 번복하자, 수사관들은 "아까는 봤다고 해놓고 왜 지금은 아니라고 하냐"며 신현이를 마구 때리고 발로 밟았다.

신천수는 순경을 죽인 죄까지 뒤집어쓰면 큰일 나겠다 싶어 지부장 부인 관련 혐의를 인정했다.

이덕수 순경이 죽은 것과 관련된 것이 훨씬 엄중한 죄인데 지부장 부인 관련 내용은 별것 아니기 때문에 니가 이것을 시인하면 앞의 것은 덮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중략) 당시에는 사실 오히려 다행이다 생각했습니다. 수사관들도 군검찰에 가서 아니라고 얘기하면 된다고 했고, 니가 지부장 부인 관련 부분을 시인해야 이 수사가 마무리된다고 했습니다. (신천수, 2006년 증언)

신천수가 수사를 받기 시작한 날부터 1차 구속영장이 떨어진 5월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수사는 급하게 진행됐고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군검찰에서 혐의를 부인하면 된다는 수사관들의 말과 달리, 군검찰은 신천수의 혐의 번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천수는 헌병대 영창에서 다시 만난 신현이에게 "왜 나를 지목했느냐"고 물었다.

신현이가 "수사관이 신천수가 그때 지부장 부인을 폭행했다고 얘기하면 좀 쉽게 봐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차마 너를 보는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하겠더라"고 말하고 "내가 너를 못 봤다고 했기 때문에 나중에 더 맞았다"고 말했습니다. (신천수, 2006년 증언)

이완형도 누군가의 고발로 합수단에 잡혀왔다. 이완형의 담당 수사관은 원산폭격 자세를 하게 한 후 엉덩이를 걷어차서 바닥으로 쓰러뜨리고 다시 세워 놓고 발로 차기를 반복했다. 같이 돌을 던진 사람을 대라고 했지만 아무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을 대려고 해도 고문을 해대는데 그 정신이 올바른 정신이 나오겠어요?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찍혀 가지고 잡혀 왔으면, 잡혀 온 그 사람이 또 새끼를 치고, 새끼를 치고 이런 실정이었어요(이완형, 영화사 느티, 2020년 8월 증언).

이완형은 의자에 꽁꽁 묶인 상태에서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았다. 이완형은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을 댔다. 수사관들은 "거짓말을 했다"면서 이완형에게 더 모질고 혹독하게 고문을 했다. 구타가 멈추지 않자 이완형은 결국 광부 이름을 떠오르는 대로 모두 말했다. 그 중 한 명이 안재였다.

붙잡혀 온 안재는 대질하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계속 구타를 당했다. 어떤 질문을 하든 무조건 "했다"라고 답해야 고문이 멈췄다. 다른 사람이 하는 본 대로 말하라는 수사관들의 강요에 못 이겨 안재는 "술 취한 강윤호가 무기고에 손 대는 것을 봤다"고 했다.

합수부의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이완형은 안재의 이름을 댔고, 안재는 다시 강윤호의 이름을 댔다.강윤호는 사북 사건 후에 정선에 끌려가 매를 맞았지만 채증 사진에 얼굴이 없다는 이유로 풀려난 상태였다. 3일 만에 다시 정선경찰서 임시조사실에 붙들려 가보니, 수사관들은 이번에는 무기고 자물통을 부쉈다는 새로운 혐의를 들이대며 '증인'까지 있다고 했다.
▲ 고 강윤호씨 영화 <1980 사북> 스틸컷. 사북사건에서 동료의 허위 자백으로 무기고 파손 혐의를 쓰고 징역형을 받았다가, 2022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고 강윤호씨.
ⓒ 엣나인필름
"무기고 열쇠를 증인이 보니까 부쉈다고 하는데 니는 이 새끼야 안 했다고 그러노", 이거 때문에 내가 고문을 많이 당했지. 그러면 이 사람한테 한번 물어보라고. 무기고의 내가 자물통을 부쉈으면 부서진 자물통이 있어 증거가 있어야 될 거 아니가. (강윤호, '진실의 힘'. 2020년 10월 7일 증언)

수사관은 안재가 조사받고 있는 방으로 강윤호를 데리고 갔다. "강윤호가 자물통을 돌로 치는 것을 봤냐"는 수사관의 말에 안재는 "봤다"고 대답했다. 안재의 진술이 증거로 인정되었고, 강윤호는 무기고 파손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다.

사건 발생 40년이 흐른 후에, 늙은 전직 광부 안재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고문을 좀 덜 받을라고 그랬던 거야. 다른 거는 없어. 내가 그 사람을 죄 덮어씌우려는 게 아니고 우선 내가 좀 살고 보자. 아파 죽겠으니까 왜 그 사람도 많이 맞았지. 내가 또 그거를 했으니까." (안재, '진실의 힘'. 2020년 10월 7일 증언)

국가폭력의 길고 어두운 터널, 빠져나오지 못한 피해자들

사북사건 피해자들 중에는, 이전에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다정한 이웃이었던 이들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평생 등을 돌리고 사는 경우가 유독 많다.

이완형, 안재, 강윤호… 이들은 한 마을에 살던 이웃이었고, 한 직장을 다니던 동료였지만, 비상 계엄 시기 공권력이 자행한 혹독한 고문의 덫에 걸려 서로를 고발하고 서로를 저주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동료 고발의 종착점에서 내려졌던 유죄 판결에 대해서, 42년 후 재심 법정은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완형도, 안재도, 강윤호도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국가폭력의 수행자들이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고,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국가가 단 한마디 사과도 없는 가운데, 세 사람은 결국 서로 화해도 못한 채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고문의 후유증도 국가폭력이 남긴 상처지만, 가족과 친구, 이웃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불신과 원한을 남긴 것은 가장 길고 오래가는 국가폭력의 최악의 상처다. 서로를 향한 손가락질은 아직 멈추지 않았고 파괴된 사북의 공동체는 아직도 속절 없이 방치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의 1980사북 특별페이지(www.jcrc.kr)에도 실립니다. 저자는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사북항쟁과 국가폭력>(지식공작소, 2021)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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