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무대, 나는 관객이자 배우가 된다

장지영 2026. 4. 7.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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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아트센터, 5월 10일까지 리미니 프로토콜의 ‘리모트 서울’ 공연
‘리모트 서울’ 관객들이 경주를 하라는 인공지능 음성 안내에 따라 달리고 있다. (c)GS아트센터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인 관객들은 헤드폰에서 나오는 인공지능(AI) 음성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묘비들을 살펴본 뒤 동작역으로 향한 관객들은 개찰구 앞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바라본다. AI 음성 지시에 따라 관객들이 박수치자 동작역을 오가는 시민들은 당황스러워한다. 시민들에겐 이들이 갑자기 공연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GS아트센터가 지난 3일 개막해 선보이는 ‘리모트 서울’은 AI 음성에 따라 관객 30명이 도보와 지하철로 120분간 도시를 누비는 독특한 공연이다. 극장이 아닌 서울 곳곳이 공연장이 된다. 일상적으로 지나치던 공간이 낯설게 다가오며 새로운 의미를 띈다. 그리고 하나의 그룹이 되어 함께 걷고 다양한 행동을 하는 30명은 관객인 동시에 배우로서 공연을 완성한다.

‘리모트 서울’ 관객들이 인공지능 음성의 지시에 따라 지하철역에서 개찰구를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c)GS아트센터

‘리모트 서울’은 독일 창작 그룹 리미니 프로토콜이 2013년 베를린 초연 후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러시아 모스크바 등 세계 32개국 65개 도시에서 선보인 ‘리모트 X’ 시리즈의 하나다. ‘리모트 X’는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새롭게 경험하는 체험형 퍼포먼스. 30명의 참가자는 각자 헤드폰 속 음성에 따라 도시를 탐험하는 동안 자신만의 결정을 내리거나 서로를 관찰하면서도 하나의 집단으로 존재한다. 여기에 기술을 상징하는 AI 음성 안내를 따르거나 거부하는 선택을 통해 참가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과 기술의 공생 등 철학적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2000년 헬가르트 하우그, 슈테판 카에기 그리고 다니엘 베첼이 결성한 리미니 프로토콜은 전문 배우를 기용하지 않고 매뉴얼에 따라 시민을 참여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현실과 연극이 교차하며 관객은 고령화, 기후위기, 죽음, 민주주의, 전쟁, 공동체 등 당면한 사회 이슈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경험하게 된다. 또한, 리미니 프로토콜은 극장이 아닌 일상의 장소를 배경으로 그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반영한 장소 특정형 공연의 대표주자로도 꼽힌다. 그동안 유럽 연극상, 독일 파우스트 연극상, 베니스 연극 비엔날레 은사자상 등 유수의 상을 받으며 세계적인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에도 2008년 ‘콜 커타’를 시작으로 지난해 ‘이것은 대사관이 아니다’까지 여러 편이 소개되며 공연계의 사랑을 받았다.

‘리모트 서울’ 관객들이 교회 안에서 인공지능 음성의 지시를 듣고 있다. (c)GS아트센터

‘리모트 X’는 슈테판 카에기가 개념과 연출을 설계했고, ‘리모트 서울’ 초연을 위한 조사와 연출은 리미니 프로토콜과 오랫동안 협업해온 외르크 카렌바워가 맡았다. 카렌바워는 지난해 12월 일주일간 서울을 답사해 동선을 구성했고, 이번 공연 개막 3주 전 입국해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스크립트와 사운드 디자인을 완성했다.

카렌바워는 최근 국내 언론과 만나 “도시는 연극적 순간으로 가득한 풍요로운 무대다. 우리가 평소 지나치던 일상에 시선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예술적 서사가 만들어진다”면서 “동시에 우리는 모두 이미 그 장면 속에서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도시를 무대로 삼으면 예상치 못한 장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관객은 계속 깨어 있게 된다”고 이번 작품을 설명했다.

리미니 프로토콜의 개념에 따라 ‘리모트 서울’의 조사와 연출을 맡은 외르크 카렌바워. (c)GS아트센터

‘리모트 X’는 죽음의 공간에서 시작해 생동감 있는 도심으로 들어가는 구조 속에 공동묘지와 교회를 거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하지만 도시마다 각각의 특징이나 분위기 그리고 사람들의 반응이 반영되는 만큼 공연이 달라진다. 이번 ‘리모트 서울’에서는 ‘개성을 드러내는 자유로운 사회’와 ‘평등을 위해 규칙이 있는 사회’ 중 선택하게 한 질문이 대표적이다.

카렌바워는 “서울은 매우 깨끗하고 질서정연한 도시다. 많은 CCTV와 규칙으로 안전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가운데 한국인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다른 도시와 비교해 두드러졌기 때문에 ‘리모트 서울’에서 개성과 규칙에 대한 질문을 새롭게 만들었다”면서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한국 관객들은 개성을 드러내는 쪽을 더 많이 택했다”고 설명했다.

‘리모트 서울’은 다음 달 10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진행한다.

‘리모트 서울’ 관객들이 강남 고층빌딩 꼭대기에서 인공지능 음성에 따라 도심을 바라보고 있다. (c)GS아트센터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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