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이란 문명 과거로 되돌리면 종전 더 어려울 수도

2026. 4. 7.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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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소환한 미군 전략폭격의 역사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이란에서의 전쟁에서 석기시대가 소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전략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도 똑같은 발언을 했다. 그는 1942년 10월부터 1944년 8월까지 유럽에서 제3 항공사단을 지휘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전출되어 1944년 말부터 일본에 대한 전략 폭격 작전을 지휘했다.

공군에서 르메이의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소련이 베를린을 봉쇄하자 베를린에 대한 보급을 위한 공수작전을 지휘했다. 그가 없었으면 서베를린 시민들은 굶어 죽었을 수도 있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전략공군사령부 사령관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대도시에 대한 폭격을 지휘했고(김태우 『폭격』), 한국전쟁 이후에는 핵무기 투하에 중점을 둔 공군전략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 군수 시설 겨냥 전략폭격, 빠른 종전 위해 민간 융단폭격으로 변질
2차 대전 독·일 초토화 민간 피해 막심, 미군 내부에서도 비판 목소리
전범국 민간 학살도 단죄 못해, 일 항복도 원폭 때문 아니라는 주장도
첨단과학 정밀 타격도 민간 오폭 불가피, 과거에서 왜 교훈 못 얻나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대응을 위해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오른쪽 둘째) 등 군 지휘부와 회의하고 있다. [사진 CIA]

1961년부터 1965년까지 공군참모총장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 시에 쿠바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지휘했고 폭격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퇴역 후에는 인종분리정책을 주장하는 미국독립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르메이는 실제 공군 비행사로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미 본토에서 대서양을 건너 이탈리아 여객선 요격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는 미 본토의 항공력으로 미국 해안 방어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육군과 해군에 소속되어 있는 항공부대가 공군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비행거리 대폭 늘린 B29의 탄생
2차 세계대전 당시 공군 폭격기 조종사는 가장 위험한 직종 중 하나였다. 많은 폭탄을 적재하기 위하여 기체가 클 수밖에 없었고, 속도도 느렸다. 항상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 방공망의 표적이 되었다. 유럽에서 미국과 영국은 모두 8만여 명의 공군 파일럿을 잃었고, 4만 대에 이르는 공군기가 추락하거나 타격을 입었다.

르메이는 지휘관이었지만, 폭격기를 직접 몰면서 지휘했다. 적의 방공망이나 전투기를 피하기 위해 폭격기에는 항상 호위 전투기들이 함께 했지만, 르메이는 종종 호위 전투기의 항속거리를 넘는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당시 전투기들은 항속거리가 폭격기보다 짧았다. 미국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태평양에서 일본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섬들을 점령하고 비행장을 닦기 시작했다.

침몰하지 않는 항모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본군이 진출하지 않은 중국의 서쪽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하는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비행거리가 너무 길어 성공률이 높지 않았다. 비행거리를 늘리기 위해 B-29가 개발되었다. B-29 개발에는 원자탄을 만드는 맨해튼 프로젝트(20억 달러)보다 더 많은 30억 달러가 투여되었다.

B-29는 비행거리도 늘었고 2만 피트가 넘는 높은 고도로 비행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는 일본의 방공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제트기류가 강하면 높은 고도에서의 적중률이 크게 떨어졌다. 이에 저고도에서 야간에 소이탄을 이용하는 폭격 전술로 전환했다. 소이탄은 고무 성분을 이용해 투하지역의 모든 목제 건물을 불구덩이로 만드는 폭탄이었다.

민간 거주지에 대한 집중 폭격
1945년 3월 9일 밤에 있었던 도쿄 폭격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도쿄의 절반이 불에 탔으며, 하룻밤 사이에 약 10만 명의 도쿄 시민이 죽었고 25만 채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 소이탄과 함께 백린탄과 네이팜탄을 투하했기 때문이었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살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폭격은 일본 전체의 66개 도시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은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말로 합리화되었다고 한다.

원자탄 투하를 포함한 도시에 대한 폭격 전략은 일본과의 전쟁을 빠르게 끝냄으로써 인명피해와 군사비를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을 수도 있다. 전후 영국의 평가는 다르지만, 민간인들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상대방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전쟁 초기 독일과 일본이 실행했던 무차별적인 전략폭격에 대한 반격의 의미도 있었다. 문제는 전략폭격으로 명명되는 이러한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피해였다.

전략폭격은 본래 적대국의 군수품 생산기지를 파괴하기 위한 폭격이었다. 독일의 부품공장에 대한 폭격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파괴된 생산시설은 곧 다른 시설로 대체되었고, 폭격 목표에 대한 적중률도 높지 않았다. 이에 민간인들의 거주지를 폭격하는 전술로 바꾸었다. 엄밀히 말하면 전략폭격이 아니라 융단폭격(carpet bomb)이었다.

르메이 “석기시대로 만들겠다” 경고
유럽에서의 함부르크 폭격과 도쿄에 대한 폭격은 주로 노동자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에 이루어졌다. 함부르크에서는 전체 건축물의 3분의 1이 무너졌고, 6만 명 이상이 죽었다. 도쿄의 폭격지역은 대부분의 건물이 목재로 만들어진 소득이 낮은 지역이었다. 폭격을 주도한 군인들 사이에서는 “만약 전쟁에서 졌다면 전쟁범죄자로 재판을 받았을 것”이라는 발언이 나오기도 했다.

도시에 대한 폭격은 엄청난 민간인의 피해를 가져왔다. 이러한 르메이의 전략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함께 일했고, 베트남 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까지도 이러한 공군의 폭격 전략을 비판했다.

르메이의 유명한 ‘석기시대’ 발언은 융단폭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도발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으면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경고’하는 전략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발간된 그의 회고록에 나오는 발언이다. 정작 르메이 본인은 후에 이 유명한 발언들을 부인하였지만, 석기시대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전략폭격은 효과적이었는가?
2차 대전 종전 후 그는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이 소유한 원자탄의 80%를 한 번의 임무로 투하할 수 있는 목표를 제시했고, 핵무기 보유량을 3배로 늘릴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소련과 중국에 참전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제한적 폭격을 진행한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르메이는 불만을 가졌다. 베트콩들을 지원하기 위한 북베트남의 통로인 호찌민 루트에 대한 폭격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석기시대’를 만든다는 목표는 적의 항복을 끌어낼 수 있었을까? 전략폭격이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다는 것이 현재까지 대부분의 연구 결과였다. 전쟁 수행능력을 축소시킬 수는 있지만, 전쟁 산업의 생산성을 낮추지 못했다는 연구(예일대학 경제성장연구소 보고서 905호, 2005)가 있으며, 조선소에 대한 폭격 효과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민간인의 죽음으로 인해 오히려 상대 국가의 전투 의지를 더 높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오히려 항전 의지를 강하게 하여 전쟁의 빠른 종전을 더 어렵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나 일본이 전략폭격 때문에 항복하지는 않았다. 1943년 이탈리아의 항복에는 효과적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정밀폭격이 가능했던 걸프전이나 구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원자탄이 떨어진 직후에도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고 오히려 휴전을 중재해줄 것으로 판단했던 소련의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졌을 때도 일본의 대본영은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범들에게 명분 준 전략폭격
아울러 전략폭격은 전쟁범죄자들에게 명분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전범들의 중요한 혐의 중 하나는 민간인 학살이었다. 그러나 이는 연합군의 전략폭격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전범들은 전쟁 재판이 승자의 논리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전쟁 초기 전범국들의 전략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폭격이 지상군의 진격, 해상봉쇄, 외교적 압력과 결합할 때에는 일정한 효과를 낼 수 있지만, 폭격만으로는 민간인의 피해만 키울 뿐이었다. 최근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정밀타격 기술이 민간인 피해를 줄이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란전쟁에서 나타나듯이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를 막기는 쉽지 않다. 잘못된 지표를 찍을 수도 있다. 공격실행 전 최소한 민간인 대피를 위한 예방조치가 필요하다.

사실 전략폭격의 적실성 문제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던 루스벨트와 트루먼 대통령은 조사를 지시했지만, 결국 적절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로부터 80년이 지나서 이란 전쟁에서 다시 ‘석기시대’ 발언이 나왔다. 나치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고, 북한과 북베트남에 최후까지 저항하겠다는 반미주의자들을 만들어냈던 전략폭격이 이란에서 과연 성공적인 전쟁전략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반을 둔 정밀타격을 통해 핵심전력을 붕괴시켜 지금까지의 역사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언제까지 과거의 교훈을 무시하고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본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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