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무너뜨린 자리, 마크롱·이재명·다카이치가 채운다

김영근 2026. 4. 6.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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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 마비, 호르무즈 봉쇄, 관세 폭탄… 세 지도자가 선택한 '협력의 반격'

[김영근 기자]

 이재명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일 청와대에서 공동언론발표 후 악수하고 있다. 2026.4.3
ⓒ 연합뉴스
지난 2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도쿄를 거쳐 서울로 왔다. 거리는 2000킬로미터에 불과하지만, 그 동선이 함축하는 외교 메시지는 훨씬 무겁다.

세계는 지금 세 겹의 위기 안에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폭탄, 이란 전쟁이 불러온 오일쇼크에 준하는 에너지 위기, WTO 분쟁해결체제의 사실상 마비가 그것이다. 미국은 지난 2월 말 이란 핵 시설을 공습하며 전쟁을 시작했고, 이란은 호르무즈해협을 봉쇄하고 두바이 호텔까지 공격하며 중동 전체의 에너지 수송로를 막아버렸다. 그 충격은 유가 급등과 글로벌 공급망 혼란으로 이어지며 동아시아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그리고 바로 그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서울·도쿄·파리가 조용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 방향은 '각자도생'이 아닌 '국제협력'이다.

"우리는 예측 가능하다" 마크롱의 일침

마크롱 대통령은 4월 1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 기업인·투자자 대상 연설에서 "유럽이 때로는 다른 지역보다 느리게 보일 수 있다"면서도 "예측 가능성은 중요한 가치이며, 우리는 지난 수년간, 그리고 최근 몇 주 동안에도 이를 입증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요즘 같은 시기에 이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사전 조율 없이 동맹국을 충격에 빠뜨리는 트럼프 방식을 겨냥한 발언으로, 그 타깃은 분명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다카이치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도 양국은 국제법에 기반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했고, 닛케이 등 일본 언론은 양 정상이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먼로주의' 행보에 따른 불확실성에 대응해 전략적 공조를 강화했다고 분석했다.

서울에서도 메시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한민국과 프랑스는 다자주의의 중요한 역할을 함께 이해하고 있다"며 "전 세계적으로 상황이 상당히 불안정한 가운데, 다자주의적 문제해결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WTO를 "국익에 반하는 실패한 시스템"이라 비판하며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 온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 속에서, 브루킹스연구소를 비롯한 국제 통상 전문가들은 WTO 분쟁해결체제가 사실상 마비된 이후 세계 무역이 규칙이 아닌 강대국 간 힘의 거래로 전환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규칙이 아닌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마크롱의 다자주의 외교는 일종의 항로 표지등이다.

세 정상이 선택한 협력의 언어

일본과 프랑스의 정상회담 성과는 구체적이었다. 양국은 원자력·핵융합 협력에 관한 정상 공동성명과 중요 광물 협력 로드맵을 각각 발표했다. 중동 정세 악화로 화석연료 조달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원자력 협력을 확대하고, 중국의 희토류 수출규제 강화에 대응해 공급망을 공동 재편하겠다는 구상이다. 프랑스 남서부에서는 양국 관민 공동 프로젝트로 희토류 정제공장이 건설되고 있으며, 2026년 말 가동 예정이다.

정상회담에 앞서, 4월 1일 도쿄에서는 제8회 일·프랑스 외무·방위장관 회의(2+2)가 열렸다. 일본 측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과 프랑스 측 바로 외무장관·보트랭 국방장관이 참석한 이 회의는 7년 만의 대면 개최였다. 자위대와 프랑스군의 합동 훈련 확대, 사이버·우주 영역 협력 강화 방침이 확인됐고, 일·프랑스 방위 협력 로드맵에도 공식 서명했다.

서울에서의 성과도 만만치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3개 협정 개정과 11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교역·투자 확대를 중심으로 경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한수원은 프랑스 국영 원전기업 오라노와 핵연료 주기 포괄 협력 MOU를, 원전 장비업체 프라마톰과는 핵연료 기술 협력 MOU를 각각 체결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우리 원전에 원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은 물론, 글로벌 원자력 시장에 공동진출하는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 의향서'와 'AI·반도체·양자 분야 협력 의향서'도 함께 서명됐다.

한국과 프랑스는 2004년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맺은 지 22년 만에 양국 관계를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기로 했다. 외교 문구 한 줄이 상징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에너지 위기·공급망 재편·안보 협력이라는 세 축이 비로소 하나의 틀 안에 묶인 것이다.

트럼프가 무너뜨리는 것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파리기후협약 재탈퇴와 WHO 탈퇴를 선언하며 80년간 유지돼 온 미국 주도 다자주의 체계를 흔들었다. 그의 관세 정치는 이제 한 나라의 통상정책 차원을 넘어섰다. 국제 질서가 규범으로 유지될 것인지, 아니면 강대국의 압박과 거래로 재편될 것인지를 가르는 시험대가 된 것이다.

WTO는 지난해 10월, 트럼프 관세 정책의 여파로 2026년 글로벌 상품 무역 성장률 전망치를 1.8%에서 0.5%로 대폭 낮추며 전망을 크게 우려했다. 한국 산업통상부 관계자는 "다자무역체제가 흔들리면 우리 기업이 누려온 기회도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며 다자 체제 복원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트럼프의 이란 공습이 석유 수급이 아닌 에너지 패권 장악과 대중(對中) 압박을 노린 전략적 베팅이었다는 점은 이미 여러 분석에서 지적됐다. 문제는 그 계산이 빗나갔다는 데 있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더해 두바이 호텔까지 공격하며 선박과 항공 모두를 묶어버렸고, 다급해진 쪽은 오히려 트럼프가 됐다. 중동 사태의 '유예 시간'이 끝나면 동아시아는 다시 미·중 충돌의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자산,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그걸 누가 메우는가

이 신뢰의 공백이 역설적으로 한국에 외교적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올해 6월 15~17일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에 정식으로 초청했고,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수락했다. G7 의장국 프랑스가 한국을 글로벌 현안 대응의 공식 파트너로 지목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G7 정상회의에서 이뤄질 글로벌 거시경제 불균형 해소와 국제 파트너십 개혁 방안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며 "선진국과 개도국의 동반 성장에 기여할 해법을 함께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이 국제 규범 재건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 주체로 나서겠다는 선언이다.

미국의 이란 공습은 석유가 아닌 패권의 문제이며, 동아시아는 중동 사태의 '유예 시간'이 끝난 뒤 다시 미·중 충돌의 무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 이 시간에 한국이 해야 할 일은 수동적 방어가 아닌 선제적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다.

국제협력의 방정식, 세 번의 실패가 남긴 교훈

세 정상의 회담이 수렴하는 지점에 서면, 선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과거의 실패다. 이번 한·불·일 협력의 의제들(에너지 다변화, 희토류 공급망, WTO 규범)은 모두 이미 한 차례씩 충격을 맞고도 제대로 복원되지 않았던 바로 그 영역들이다.

①첫 번째 실패: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신뢰의 붕괴

2011년 3월, 후쿠시마 제1원전이 무너졌을 때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가장 늦게 인정한 것은 '단일 체계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라는 구조적 결함이었다. 사고 이전 원자력은 온실가스를 줄이는 주요 수단으로 각광받으며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후쿠시마는 그 기대에 제동을 걸었고, 원전 안전성 확보를 위한 국제 공조 체제의 중요성을 크게 부각시켰다. 특히 한·중·일 인근 3개국의 비상통보 및 대응 체계 구축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 제기는 15년 가까이 제도화되지 않았다.

지금 한·불 간 핵연료 주기 협력 MOU, 일·불 간 원자력·핵융합 공동성명이 나온 것은, 후쿠시마 이후 거론됐지만 실현되지 않은 국제 공조 필요성이 이란발 에너지 위기라는 새 충격 앞에서야 비로소 협정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위기는 반복됐고, 학습은 늦었다.

② 두 번째 실패: 희토류 90% 의존, 각자도생이 부른 굴욕

2010년 센카쿠열도 분쟁 당시 중국 정부는 희토류 수출 통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일본으로 향하는 희토류 선적이 돌연 멈췄고, 첨단 제조업에 비상이 걸렸다. 며칠 만에 일본 정부는 나포한 중국 선장을 조건 없이 석방하는 굴욕적 양보를 했다. 당시 일본의 중국산 희토류 수입 비중은 90% 이상이었다.

이후 일본은 뼈를 깎는 공급망 재편에 나섰다. 호주 라이너스에 지분 투자를 하고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했으며, 미국·EU와 함께 2012년 WTO에 중국을 제소해 2014년 협정 위반 판결을 이끌어냈다. 결국 중국의 희토류 수출쿼터 제도는 2015년 철폐됐다.

그러나 일본도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다. 정련 기술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이전해준 탓에, 지금도 그 기술을 역으로 중국에 의존하는 역설적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은 금속 희토류의 중국 의존도가 여전히 80%에 육박한다. 한국은 일본이 2010년에 맞은 충격을 아직 제대로 학습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한·불 핵심광물 공급망 협력 의향서는 그 학습이 뒤늦게 시작되는 신호이지, 완성이 아니다.

③ 세 번째 실패: 1995년생 WTO는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WTO 상소기구는 2019년 이후 미국의 위원 임명 봉쇄로 기능을 멈췄다. 패소국이 상소만 제기한 채 최종 판정을 지연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규칙은 남아 있지만, 규칙을 끝까지 집행할 장치가 멈춰 선 것이다.

2010년 희토류 분쟁 당시 WTO 제소가 유효했던 건 상소기구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장치가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법 301조와 232조라는 우회로를 택하며 규범 체계를 더욱 손상시키고 있다. 그 공백은 강자의 거래로 채워지고 있다.

마크롱이 도쿄와 서울에서 거듭 '다자주의'를 강조한 것은 당위의 언어가 아니라, 체계가 망가진 자리에서 나오는 절박함이다.

세 가지 실패의 공통 구조는 하나다. 위기가 왔을 때 혼자였다는 것, 그리고 위기가 지나간 뒤 협력의 제도화를 미뤘다는 것. 지금 한·일이 프랑스와 맺는 협정들이 진정한 교훈의 반영이 되려면, 양해각서 서명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후쿠시마가 남긴 비상통보 체계, 희토류 쇼크가 남긴 공급망 이중화, WTO 마비가 드러낸 규범 집행의 공백, 이 세 영역 모두에서 실질적 제도의 골격이 갖춰져야 한다. 역사는 충격 뒤에 협력을 선언한 나라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협력을 제도로 완성한 나라들만 기억한다.

미국과 더불어, 그러나 미국에 의존하지 말고

역설이 있다. 이 모든 협력의 목표는 미국의 리더십을 우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을 '책임 있는 패권'의 자리로 되돌리는 데 있다. 트럼프의 단기 계산이 소탐대실로 끝나려면 신뢰를 가진 국제 질서가 건재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신용 위에서 작동하고, 신용은 신뢰를 먹고 자란다.

다카이치 취임 이후 불과 5개월여 만에 미국·이탈리아·영국·캐나다에 이어 프랑스까지, G7 정상 대부분이 일본을 찾았다는 사실은 동아시아가 단순한 미국의 위성 지역이 아닌, 새로운 다자 질서의 형성지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은 이 흐름의 바깥에 있을 수 없다.

그 차이는 이미 수치로 드러난다. 2010년 희토류 충격을 제도적 공급망 재편으로 완성한 일본은 중국 의존도를 절반 이하로 낮췄고, 충격을 외면한 한국은 여전히 80%대 의존 구조에 묶여 있다. 협력을 제도로 완성하는 나라와 선언으로 끝내는 나라 사이의 간격이, 다음 위기에서 생존과 굴복을 가른다.

한·불 관계가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되고 이재명 대통령이 G7 테이블에 앉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위기의 시대에 협력의 언어로 말하는 나라만이 패권 질서 회복의 선봉에 설 수 있다. 세계는 각자의 위치에서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WTO 중심의 자유무역 질서, 그리고 글로벌 평화. 대한민국의 자리는 선언이 아닌 제도로, 그 방향의 맨 앞줄에 있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 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빈 방한 공식 환영식에서 프랑스 측 수행원 인사를 위해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20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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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글쓴이 김영근은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며, 사회재난안전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 및 "북핵 리스크 관리와 ‘국제안보레짐’의 변용: 한미일 ‘연계정치’ 및 정책조정 메커니즘을 중심으로", 『포스트 제국주의』(공저), 『한일관계사 1965-2015. II: 경제』(공저), 『한일 관계의 긴장과 화해』(편저)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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