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분짜리 영화가 어떻길래... 자세부터 고쳐앉게 된다

김성호 2026. 4. 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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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1309] 제4회 반짝다큐페스티발 <일순>

김성호 평론가

박군제 감독의 영화를 한 차례 더 다뤄보기로 하였다. 얼마 전 폐막한 제4회 반짝다큐페스티발(이하 반다페)을 며칠 앞두고였다. 그는 제 작품을 더는 이 영화제에 내지 않겠다 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영화제가 그의 작품을 상영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거창하게 표현하여 의식의 확장이랄까, 적어도 사고가 자극되는 인상을 받는다. 지난해 다루었던 <도트 유니버스의 어느 분신사바>부터가 그러했다. 제목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인상을 주는 이 독특한 다큐는 차원을 표류하는 이가 독특한 평면도트 우주세계에 도달했다가 부유령이 되어 우리가 사는 우주에 틈입한다는 기묘한 설정을 갖추고 있다.

실험영화치고는 그리 흔치 않게도 나름대로 이러저러한, 거의 SF라거나 공포영화와 맞닿는 서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물론 넷플릭스 같은 곳에서 마주하는 SF나 공포를 기대한 이라면 당혹스럽겠지만 말이다.
▲ 일순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사라질 터전에 아직은 남아 있는 것들

제4회 반다페 섹션8의 포문을 연 작품은 박군제 감독의 <일순>이다. 휘황찬란했던 전작의 제목과 대비되는 담백한 이름부터가 자세를 고쳐앉게 한다. 19분을 조금 넘는 단편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제의 지평을 확장하기 충분하다.

영화는 어느 공간을 비춘다. 영화가 찍고 있는 장소가 정확히 어느 도시의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바닷가가 있는 너른 터, 무너져가는 집과 그곳에 사는 이와 그 주변을 오가는 고양이 따위의 동물들이 있단 것만 알 뿐이다. 나붙은 종이는 이곳에 행정대집행이 이뤄질 것임을 알도록 한다. 말하자면 어느 순간 없어질 것들이 가득한 장소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영화가 찍고 있는 풍경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다른 공간이 될 테다. 무튼 아직은, 적어도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엔 그곳은 그곳으로 남는다.
▲ 일순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실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리고

녹슨 구조물과 무성히 자라나는 풀과 나른한 고양이와 부수고 짓는 데 필요한 장비, 차량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이에서 박군제 감독이 꼭 쓸 법한 시도들, 그러니까 화면이 깨어져 나가고 파열된 영상이 디지털화한 이미지로 화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실재하는 무엇을 찍은 영상이 도무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영상에 덧입혀지는 음성은 AI로 제작한 것이었음을 어렵잖게 알아챌 수 있다. 그 소리부터가 우리가 일상 가운데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러니까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현현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관객은 그를 영상 위에 얹어지는 소리의 파동으로, 그러니까 편집툴 위의 디지털 신호로써 이해한다. 음성은 어느 순간 더욱 기계화되고 도무지 산 무엇이 낼 수 없는 기기괴괴한 소리로 화한다. 그때쯤이면 도대체 세상에 진짜로 존재하는 게 무엇인지 확언할 수 없다. 가만 보면 우리가 실재하는 것이라 믿는 저 고양이조차도, 그래 고양이도 말이다. 디지털 기호, 0과 1로 변환하여 저 장막 앞에 구현된 상일 뿐이지 않은가.

스크린 위의 고양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원본, 피가 흐르고 털이 날리는 그 고양이와 얼마나 같고 다를까. 그러나 우리가 진짜로 존재한다 믿는 그 고양이조차, 손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조차도 우리 뇌의 전기신호일 뿐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세상에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와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온갖 것들의 구분이란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할까. 뭐 그렇고 그런 생각들, 쓸 데 없고 쓸 데 있는 생각들.
▲ 일순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의 경계에서

자, 나는 <일순>의 한 장면이 더없이 탁월하다 여긴다. 진짜와 가짜, 현현하는 것과 현상하는 것과 실재하는 것을 생각할 즈음 커다란 바퀴 두 개가 화면에 모습을 내보인다. 육중한 무게일 게 분명한 그 바퀴들은 중장비 차량에 달린 것으로, 아스팔트 위를 무겁게 누르고 있다. 가만히 땅에 붙은 그 바퀴를 화면은 가만히 찍어낸다. 더없이 사실적인 장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바퀴에 실린 무게가 사라진다. 아래 짓눌린 부분이 펴지며 오로지 중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힘만이 작용하는 모양으로 바뀐다. 들리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나는 생각한다. 이건 모두 가짜다. 실사라고,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은 이 바퀴조차도 기술로 구현한 가짜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퀴가 이렇게 들릴 수는 없다. 그때쯤이면 바퀴가 정말로 들린다. 허공으로 올라온다. 차량 전체가 지면으로부터 들리는 모양새다. 화면은 처음과 꼭 같이 멈춰서 바퀴 두 개가, 이제는 공중에 뜬 모습을 보여준다. 가짜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수는 없다.
▲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 반짝다큐페스티발
인간의 인식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그런데 이 영리한 영화가 그 프레임 바깥을 비춘다. 유압 장치가 땅을 딛고서 차체를 들고 있는 것이다. 차에 붙은 바퀴는 그렇게 허공으로 뜬 것일 뿐이다. 사다리차와 같이 무거운 장비를 실은 차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체를 고정하는 장치다. 그러니까 이건 세상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진짜다. 그러나 나는 고작 바퀴 두 개만 보고서, 그것이 떠오르는 모양만 보고 이것이 가짜라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마술이라고, 마법이라고 말이다. 제 아무리 지성을 갖췄다 자부하는 인간의 이해가 이토록 얄팍하다. 제 지식이 스스로를 더 잘 속도록 한다.

<일순>에 대해 장황하게 적었으나 이 영화가 진정으로 어떤 영화인가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를 본 다른 관객은 나와는 아주 달리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박군제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무한히 지워지는 이름 없는 공간들의 잔영"이라고, "사라질 공간을 담은 기록의 단면들은 끝없이 뻗어가는 비가역적인 만화경 차원들로 발산된다"고 말이다.

그는 이어 "어떤 굉음은 유랑하는 생명에게 평온의 자장가"라며 "녹슨 구조물은 따뜻하고 두터운 이불"일 수 있다고 말한다. "시절들의 시작과 끝은 결코 동일하게 되풀이되지 않는다"며 "목소리는 부조화하며 소리풍경은 불일치한다"고도 적는다. 빼놓을 수 없는 한 문장은 "구조와 푸티지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아이러니는 슬픔이나 분노가 아닌, 새로운 여정을 떠나는 존재들에게 바치는 나지막한 애정과 존경이다"란 것. 그러고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를 바라는 영화는 아닌 때문이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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