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처마'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
[조미선 기자]
강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인스타그램 피드마다 벚꽃 사진이 넘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눈길을 보낼 때, 벚나무는 꽃이 피는 동안 귀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길가에 흔하게 피는 애기똥풀은 어떨까. 누군가 멈춰서 그 작은 꽃을 감탄하며 들여다볼 때, 애기똥풀도 벚꽃 못지않게 귀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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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레드릭 배크만의 <나의 친구들> 책표지 사진 |
| ⓒ 조미선 |
그러나 열네 살의 여름을 요아르도 화가도 버텨낼 자신이 없다. 요아르는 가방에 칼을 넣고 다니고, 화가는 약통에 약을 모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은 신문에서 미술 공모전 소식을 발견한다. 부서지기 쉬운 화가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들은 그에게 작품을 내라고 설득한다. 요아르는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자전거를 팔아 물감과 재료를 마련해준다.
"요아르는 이렇게 속삭이면 되는 줄 몰랐다. 젠장, 아무거나 그리기만 하면 돼. 안 그러면 널 잃을까 봐 겁이 나서 그래."
늘 남의 것을 훔쳐 타던 요아르에게 그 자전거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었다. 그걸 아낌없이 팔아버린 것이다.
25년 뒤 화가는 친구들의 바람대로 세계적인 거장이 된다. 열네 살에 그린 '바다의 초상'은 경매장에서 최고가로 낙찰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화가는 전 재산을 털어 그 그림을 되찾고, 경매장 하얀 벽에 낙서를 하던 소녀 루이사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화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눈빛이 있었다. 미술관 침입으로 경찰서에 끌려갈 뻔한 아이들을 보증해준 크리스티앙의 어머니. 마약으로 아들을 잃은 그녀는 화가에게서 죽은 아들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를 예술학교에 추천한다. 그녀가 화가에게 건넨 것은 기회가 아니라 시선이었다. 이 소설에서 시선은 일방적이거나 단절되지 않는다. 물처럼 흘러 다음 사람에게 가 닿는다.
훗날 화가는 경매장 뒷벽에 낙서하는 루이사를 발견하며 그 시선을 돌려준다. 값비싼 그림이 아니라 루이사 자체가 그의 유산이라는 그의 말은 이 소설 전체의 논리를 압축한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사람이 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이 그를 처음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하지만, 한 소년을 저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어떤 이의 믿음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다."
화가가 빛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 깨달았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전거를 기꺼이 팔아 치운 친구들의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이 빛날 수 있는 힘은 내면에서만 솟구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믿어주고 응원하는 타인의 사랑과 지지라는 연료가 더해질 때 비로소 환하게 타오른다.
결국 화가의 친구들과 화가에게서 시작된 이 다정한 시선은 루이사를 거쳐, 다시 어느 길가 벽에 낙서하는 이름 모를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5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이야기는 상처 받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도 누군가에게 '처마'가 되어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벚꽃처럼 화려하게 주목 받지 못해도, 길가에 핀 애기똥풀 같은 존재를 서로 들여다봐 주는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듯 그렇게 바라봐줄 때 누군가는 하루를 버티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날아갈 힘을 얻는다.
강변의 벚꽃은 곧 지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귀한 존재가 된 애기똥풀은 언제까지나 예쁘게 빛을 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스타그램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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