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아닌 여성과는 단 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퇴행
[이봉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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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31일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이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원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의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김 의원은 "정 후보가 성동구청장 재직 당시 '2023년 국제참여민주주의 포럼 및 글로벌 문화 페스티벌 참석'이라고 출장 목적을 기재한 멕시코 출장에 동행한 청년정책전문관은 여성인데 공무국외출장 심사 의결서에는 성별을 '남성'으로 표기해 놓고 의원실에 제출한 성동구청 자료에는 성별 항목을 가려서 제출했다"고 했다. 김 의원은 "여성 직원과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또는 공문서를 허위 조작한 게 아니라면 굳이 성별만 딱 가리고 줄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
| ⓒ 남소연 |
최근 국민의힘 김재섭 의원이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원오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향해 던진 의혹의 핵심입니다. 정 후보가 성동구청장 재임 시절, 여성 직원과 단둘이 멕시코 칸쿤으로 출장을 다녀오면서 서류에는 해당 직원의 성별을 남성으로 기재했다는 것입니다.
서류상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행정적으로 따져 물을 일입니다. 하지만 김 의원이 이 의혹을 제기하며 방점을 찍은 곳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여성 직원만 동행'이라는 대목입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 응축된 저열한 시선과 전근대적인 편견은,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도 깊은 모멸감과 시대착오적인 피로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합니다.
그 직원은 정당한 절차를 거쳐 선발되어 업무상 필요에 따라 출장에 동행한 대한민국 공직자입니다. 그가 그 자리에 가기 위해 쌓아온 전문성과 성과, 밤낮을 가리지 않았을 노고는 김 의원의 입을 거치는 순간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징만 남았습니다. 동료의 존재 가치를 성별 하나로 소거해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직업 현장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가장 흔하면서도 지독한 차별입니다.
만약 그 직원이 남성이었다면 김 의원이 과연 남성과 단둘이 칸쿤에 갔다며 의혹을 제기했을까요? 아마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성끼리의 출장은 당연한 업무로 보면서, 여성 직원이 포함된 출장은 밀월이나 부적절한 관계를 암시하는 스캔들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성차별적 이중잣대입니다.
공적인 업무 수행을 사적인 영역의 구설로 끌어내리는 행위는 당사자에게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을 안깁니다. 김 의원의 의혹 제기 과정에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사생활 노출 위기에 처한 여성 공무원은 이제 조직 내의 따가운 시선까지 견뎌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구조적 폭력입니다.
여성 공직자를 저급한 시선으로 재단
80년대생 젊은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정치를 자임해 온 김재섭 의원이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놀라울 정도로 퇴행적입니다. 실무자의 성과를 성별의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낡아 빠진 구태 정치보다 더 고약한 행태입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식의 의혹 제기가 여성 공직자들의 활동 범위를 위축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여직원과 출장을 가면 말이 나온다는 인식이 퍼지면, 보신주의에 젖은 관리자들은 여성 부하 직원을 주요 업무나 해외 출장에서 배제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성이 실력을 증명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펜스 룰(Pence Rule)'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2002년 마이크 펜스 전 미국 부통령이 밝힌 "아내 외의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는다"는 신조에서 유래했습니다. 2017년 미투 운동 확산 이후 성 관련 오해를 피하려는 방어 기제로 주목받기도 했으나, 이는 직장 내 정보 공유와 네트워크 형성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는 명백한 차별 행위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여성 자체를 기피 대상으로 취급하여 고용이나 승진 등에서 또 다른 장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김재섭 의원의 치졸한 성차별적 의혹 제기가 아무런 저항 없이 용납된다면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은 더욱 단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을 함께 일하는 동료가 아닌 감춰야 할 문제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인격권과 노동권을 동시에 침해하는 무례한 행태입니다.
우리나라의 양성평등 및 여성 정치 참여 지수가 세계적으로 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여성 공직자를 저급한 시선으로 재단하는 인식이 여전히 정치권 요직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을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유리천장은 결코 깨지지 않습니다. 김 의원의 발언은 그 천장을 더욱 단단한 방탄유리로 보강하는 꼴입니다.
김재섭 의원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발언으로 상처 입은 해당 공무원과, 제 소임을 다하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 공무원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정치인은 결국 유권자의 엄중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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