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 한국인"은 왜 천리포 야산에 수백억을 쏟아부었나

이희용 2026. 4. 6.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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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월드코리안 8] '푸른 눈의 나무 할아버지' 민병갈

[이희용 기자]

▲ 천리포 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민병갈이 만년에 천리포 수목원에서 찍은 사진.
ⓒ 천리포수목원
해방 후 가장 먼저 우리나라로 귀화한 서양인은 1966년 국적을 취득한 예수회 신부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한국명 길로련)이지만 미국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줄곧 살다가 숨을 거둔 명실상부한 서양인 귀화 1호는 칼 페리스 밀러(한국명 민병갈)다. 1979년 11월 6일 한국 국적을 얻었다. 생소한 이름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충남 태안의 천리포 수목원을 만든 인물이라고 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기도 포천시 광릉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는 8명의 얼굴 부조가 새겨져 있다. 2001년 개관과 함께 박정희, 김이만, 현신규, 임종국이 헌정됐고 민병갈은 2006년 5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아래에는 "이 땅과 나무를 사랑한 민병갈 (중략) 국민에게 선물한 천리포 수목원은 우리나라 식물 자원의 보고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일본군 포로 신문하다가 한국인에게 연민 품어
▲ 미 해군 정보장교 밀러 중위 미 해군 정보장교로 한국에 부임한 칼 페리스 밀러 중위(오른쪽).
ⓒ 천리포수목원
밀러는 1921년 12월 2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광산촌 피츠턴에서 2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15살 때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는 워싱턴DC 국방부로 취직해 생계비를 벌었고, 고모가 3남매를 보살폈다.

버크넬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해군 정보학교에 입학해 일본어를 배웠다. 이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군종 신부 출신의 교장 에드워드 배런 중령은 한국에서 10년 넘게 선교한 경험을 들려주며 "전쟁이 끝나고 점령지로 배속되면 일본 대신 한국 근무를 자원하라"고 권했다.

1944년 12월 중위로 임관한 뒤 이듬해 4월 오키나와로 투입돼 일본군 포로들을 신문했다. 징병으로 끌려온 한국인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며 연민을 품게 됐다. 말로만 듣던 종군위안부들도 만났다. 1945년 8월 종전 후 일본 부임 명령을 받았으나 사령부에 요청해 한국에 부임하기로 한 장교와 맞바꿨다. 1945년 9월부터 서울의 미 군정청에 근무하다가 이듬해 8월 전역과 함께 귀국했다. 하지만 "전생에 한국인이었을 것"이라는 자신의 말처럼 한국의 자연과 인심에 이끌려 5개월 뒤 군정청 직원으로 돌아왔다.

군정청에서 원한경(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 친해졌다. 원 목사는 밀러를 기특하게 여겨 자신이 지은 한글 교본과 한국 관련 영어 논문 몇 편을 건네주고 아들 원일한(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Ⅱ)을 소개해줬다. 그때부터 밀러는 한국어와 한국 공부에 몰두했고 원일한과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주말이면 차 몰고 시골 찾아 촌로들과 대화
▲ 촌로와 대화 나누는 민병갈 민병갈은 젊은 시절부터 틈나는 대로 시골을 찾아 촌로들과 대화 나누기를 즐겼다.
ⓒ 천리포수목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군정청이 해체된 뒤에도 밀러는 미국 경제협조처(ECA) 한국지부에 근무했다. 일과 후에는 한국어와 한문을 익히고 주말이면 차를 몰고 시골을 찾아 촌로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들도 우리말을 할 줄 알고 한문을 척척 읽는 서양인을 신기하게 여겨 대화를 즐겼다.붓글씨를 배우며 한국식 이름을 짓고 싶어 하다가 1952년 부산 피란 시절 민병갈이라고 정했다. ECA에 근무하며 의형제를 맺은 한국은행 간부 민병도의 성(민·閔)과 돌림자(병·丙)를 따고 본명의 '칼(Carl)'과 발음이 비슷한 '맑을 갈(㵧)'자를 붙인 것이다. 서예 스승 이건직에게 청해 '동방에 온 나그네'란 뜻의 '동여(東旅)'란 호를 받았다. 말년에는 수양딸 안선주 교무의 권유로 원불교에 입교해 임산(林山)이란 법호도 얻었다.

한옥 생활도 부산에서 시작했다. 자신이 미국 유학을 주선해 준 남포동 이기환의 방에서 지냈다. 서울로 올라온 뒤 북촌의 팔판동 대갓집 별채를 거쳐 독립문 근처 현저동의 한옥 독채에서 10년간 살았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에서도 한동안 거주했다.

ECA 한국지부가 해체돼 유엔한국민사지원단(UNCACK)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4년 한국은행 상임고문으로 위촉됐다. 한국에 눌러앉기로 작정하자 마루와 안방을 전통 고가구와 서화로 꾸며놓고 한복 차림으로 외국인 친구들을 초대해 한식을 대접했다. 왕립아시아학회(RAS) 회장도 맡아 외국인 대상으로 한국 역사·문화 강좌를 열고 버스를 빌려 전국의 명승고적으로 답사 여행을 다녔다.

한국 사람을 닮으려다가 훨씬 더 한국인답게 살고 한국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1961년 3월 19일 자 동아일보는 '순한국 살림하는 이방인'이란 제목의 기사로 그의 생활상을 소개했다. '옷도 음식도 집도' '고전 취미까지 대단' "근대 빌딩은 싫어" 등의 부제만 봐도 그가 얼마나 순한국식으로 살고 토종 한국인처럼 생각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 ‘순한국 살림하는 이방인’ 민병갈의 한국 생활상을 소개한 1961년 3월 19일자 동아일보 지면.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한국어 실력도 늘어 1963년 4월부터 동아일보의 인기 칼럼 '서사여화(書舍餘話)'에 기고도 했다. '설을 음력으로 쇠자'(4월 22일 자)거나 '공용건물을 한식으로 짓자'(6월 5일 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자연미 없는 예배당 건물을 꼬집고(5월 2일 자) 제주도의 환경 파괴 행위를 꾸짖기도(5월 24일 자) 했다. 글마다 한국인보다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하게 묻어난다.

"나무를 지켜만 주고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

무엇보다 민병갈을 한국인의 기억 속에 고마운 서양인으로 남게 만든 것은 천리포 수목원이었다. 그가 수목원을 설립한 동기는 우연에서 비롯됐다.

민병갈은 여름휴가 때면 한국은행 부총재를 지낸 장기영과 송인상의 만리포 별장을 즐겨 찾았다. 1962년 딸의 혼수 비용이 필요하니 인근 천리포의 바닷가 야산을 사 달라는 마을 노인의 부탁을 받고 땅 2만㎡(약 6천 평)를 사들인 뒤 한동안 잊고 있었다.

민병갈은 등산을 즐겨 북한산, 지리산, 계룡산 등 웬만한 곳은 다 훑었다. 산을 다니며 아무리 헐벗은 산이라도 절 주변에는 나무들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무 가꾸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결정적 계기는 1963년 설악산을 종주하며 서울대 임학과에 다니던 홍성각을 만나 식물학에 눈을 뜬 것이다. 훗날 이름난 식물학자가 된 홍성각은 민병갈과 식물 탐사 여행을 다니다가 스승 이창복 교수를 소개해주고 서울대 임학과 학생들의 현장 실습에도 데려갔다.

민병갈은 이창복에게 기초 지식을 배우고, 그의 제자 조무연 국립시험장 연구원한테서 실무를 익힌 뒤 수목원 설립에 나섰다. 미국호랑가시학회 회지에 "나를 키워준 나라에 보답하는 가치 있는 시도"라고 회고했듯이 보은의 뜻도 담겨 있었다. 천리포 터는 몇 년 사이에 4만 평으로 불어나 있었다.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내 땅도 사 달라고 졸라대자 모두 매입한 것이다.
▲ 매입 당시의 천리포수목원 터 마을 주민의 부탁을 받고 1962년 민병갈이 매입한 천리포 땅.
ⓒ 천리포수목원
1970년 봄 공사를 시작했다. 본부, 쉼터, 창고로 쓸 집들은 무악재 도로 확장 공사로 헐린 한옥들의 폐자재를 실어와 지었다. 그해 6월 21일 본부 격인 해송집 상량식이 열렸다. 천리포 수목원은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1971년 4월 10일, 김이만의 지도에 따라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에서 실어 온 묘목들을 심었다. 바로 앞 무인도 닭섬(낭새섬) 등 주변 땅도 더 사들였다.

민병갈은 금요일 오후만 되면 천리포에 내려와 월요일 새벽 서울로 다시 출근할 때까지 나무를 심고 숲을 돌봤다. 수목원 구석구석을 돌며 삽과 호미질을 했고, 식물도감을 뒤져 나무와 풀의 학명을 모두 외웠다. 해마다 미국 나무 경매장에도 한두 차례씩 들러 신품종 묘목과 종자를 사들였다. 국제 나무시장에서 그는 알아주는 큰손이었다.

민병갈은 자식처럼 키운 나무에 상처를 줄 수 없다며 인위적으로 나무를 보기 좋게 다듬는 것을 싫어했다.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를 지켜만 주고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사람 통행을 방해해도 나무가 우선이어서 그대로 두었다. 농약과 기계를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고, 철저한 기록과 관리로 정평이 났다.

1982년 완도호랑가시나무를 발견해 국제학회에 등록하는가 하면 새로운 목련 품종을 잇따라 개발하는 등 학문적 성과도 많았다. 국제 교류에도 앞장서 종자를 다수 확보하고 1997~1998년 국제목련학회, 미국호랑가시학회, 국제수목학회 총회를 개최했다. 2000년에는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국제수목학회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 인증을 받았다.

민병갈은 인재를 기르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장학금을 주어 학교를 다니게 하고 해외 연수생도 선발했다. 미국 예일대 부설 마시수목원 부원장이 된 김군소와 영남대 교수를 거쳐 천리포 수목원장을 지낸 김용식이 대표적이다. 인근 초등학교와 농업학교에도 묘목과 씨앗을 보내 학생들이 심고 키우도록 했다.

이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1974년 산림청장 감사패, 1989년 영국왕립원예협회 공로메달, 1992년 국제목련학회 공로패, 1996년 환경부 장관상, 1999년 한미우호상, 2000년 국제수목학회와 미국호랑가시학회 공로패, 2002년 금탑산업훈장과 미국 프리덤재단 공로 메달 등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내 산림자원 보호와 육성에 평생을 바친 미국 출신의 귀화인 민병갈(閔丙葛.미국 이름 칼 페리스 밀러)씨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2002.3.11
ⓒ 연합뉴스
"무덤 쓰지 말고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

민병갈은 40년 동안 천리포 수목원에 수백억 원을 쏟아부었다. 그 많은 돈은 어디서 났을까. 그가 살아 있을 때 수목원 운영으로 번 돈은 한 푼도 없고 후원금만 1억여 원 들어왔을 뿐이었다.

비밀은 주식과 채권 투자였다. 한국은행에서 일해 정보가 많았고 이재에도 밝았다. 고도성장기여서 시운도 따랐다. 액면가로 유일한에게 받은 유한양행 주식이 목돈으로 돌아와 종잣돈으로 삼았다. 1984년 한국은행에서 퇴임하자 증권업계의 영입 제의가 잇따라 한양증권, 쌍용투자증권, 굿모닝증권에서 일했다.

그는 독신으로 지내며 고아 4명을 입양해 키웠다. 나무들과 결혼한 셈이었다. 2002년 4월 8일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5살 청년으로 한국에 들어와 81세 노인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 손자와 함께 즐거운 식사를 기다리며 민병갈은 결혼하지 않은 채 양자만 4명을 들였다. 손자를 안고 며느리가 준비하는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 천리포수목원
"내가 죽으면 무덤을 쓰지 말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는 말을 남겼으나 유족과 수목원 임직원들은 완도호랑가시나무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2012년 유골을 수습해 고인이 아끼던 태산목 아래 수목장으로 안치했다.
천리포 수목원은 2009년 이전에는 사전 허락을 받은 식물연구자나 후원회원만 들어올 수 있는 '금단의 비밀정원'이었다. 2007년 12월 기름 유출 사고로 피해를 본 태안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고 재정 위기에도 숨통을 트려는 의도로 부분 개방을 결정했다.
▲ 천리포수목원 목련축제 2024년 5월 천리포수목원 목련축제를 찾은 탐방객들이 목련꽃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천리포수목원
총면적 58만 9429㎡(약 17만8000평)의 천리포 수목원은 밀러가든, 목련원, 종합원, 침엽수원, 낭새섬, 에코힐링센터, 큰골 7개 구역으로 나뉜다. 동백나무 1096종, 목련 926종, 호랑가시나무 566종, 무궁화 371종, 단풍나무 251종 등 국내 최다인 1만 6895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민병갈의 일대기와 유품을 전시한 민병갈 기념관과 민병갈 식물도서관도 세워졌다.

해마다 민병갈의 기일을 전후해 천리포 수목원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목련이 꽃잎을 피운다. 올해도 이곳에서 목련축제가 3월 27일부터 4월 19일까지 열린다. 모친 에드나가 유달리 좋아해 어머니 나무로 부르던 라즈베리 펀도 있다. 민병갈이 명명해 국제목련학회에 정식으로 등재된 변종이다.

민병갈은 "다음 생에는 개구리로 태어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천리포 수목원 곳곳에는 개구리 조각상이 눈에 띈다. 그는 제2의 조국에 값진 선물을 안겼지만 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외면해 죄스러웠다. 청개구리 우화처럼 민병갈의 환생인 천리포 수목원의 개구리들도 비만 오면 어머니 나무를 보고 울어대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민병갈, 나무 심은 사람> <나무야 미안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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