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놈을 가슴에 품었더냐...선수 이름을 '사회면'에서 만난 날
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야구팬이 되었고, 무엇을 견디며 남았으며, 무엇 때문에 떠났는가. 이 연재는 한국야구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 야구팬들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시도다.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 구단과 선수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이 연재는 분석이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우리는"이라는 1인칭 복수의 시점으로, 야구팬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편지다. <기자말>
[김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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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따위 야구를 왜 보고 있나, 라고 스스로 물은 세월이 쌓여 이 따위 야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야구팬이다. |
| ⓒ 유성호 |
"......의 유력한 용의자가 지방 소재 모 구단 소속의 프로야구선수로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뉴스를 마주하게 되는 날이 있다. 팀의 연패 소식을 접하는 날보다 더 싫은, 그런 날을 야구팬 노릇 하다 보면 어차피 한 번씩은 만나게 되어 있다.
그 순간, 팬들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다. 설마 우리 팀은 아니겠지. 10개나 되는 팀들 중에, 특히나 순해 빠진 내 팀 선수들일 리가 없지. 하지만 확신 다음엔 의심이, 그 다음엔 짜증이 밀려오는 시간들을 피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이름이야 어차피 곧 드러나게 되어 있고, 그래서 길지 않은 그 간격 속에서 10개 구단 팬들은 동시에 지옥 같은 시간을 경험한다.
대개 그 과정은 이렇게 이어진다. 야구팬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에 정보가 모여든다. '내 친구 형이 검사인데', 또는 '아는 기자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따위로 시작하는 온갖 지피셜, 뇌피셜들이다. 그렇게 가능성 있는 이름들이 하나씩 거론되고, '그 선수가 그럴 리 없다'는 인정론과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냉정한 현실론 사이에 승자도 보람도 없는 논쟁이 이어진다. 그렇게 서로의 불안을 들쑤시다 보면, '만에 하나 우리 팀이라면, 그나마 제발 핵심 선수만은 아니었으면' 하고 한 발씩 물러서면서도 기도는 더 간절해진다.
금지어들이 호출되는 시간
무성한 추측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기는 탁해진다.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혐의가 중하다는 얘기고, 그렇다면 팬들의 가슴에 남길 상처도 깊어진다는 얘기다. 여러 팀 팬들이 모인 공간에서는 더 노골적인 말들이 오가기도 한다. '아무개 팀의 아무개일 가능성이 높다'는 추론에 '당신네 팀 아무개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반론이 맞서는 헛손질들.
그 와중에 서로 어딘가를 긁히면 서로의 기억 속 '금지어'들을 하나둘 깨워내며 레드라인을 넘고, 각 팀의 어두운 역사들이 파묘되어 '칩', '약', '조작', '폭력' 같은 단어들이 팀 이름과 뒤섞인다. 그쯤 되면 이미 모두가 공격하고 모두가 공격 받는 난장판이다. 사실 그것은 밖에서는 별 관심도 없는, 야구팬과 야구팬이 물고 물리는 그들만의 전쟁이다.
그리고 마침내 이름이 공개되는 순간, 긴장은 다른 감정으로 급변한다. 허탈함. 그리고 곧이어 따라오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끄러움. 잘못한 것 없이 고개가 숙여지면서도 속에서는 분노와 배신감이 함께 치밀어 오른다. 잘하든 못하든 유니폼 입은 동안만이라도 야구 하나만 생각해 달라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요구였더냐는 분노. 그깟 놈을 가슴에 품고 울고 웃었던 날들이 허무해지는 배신감.
그 순간 우리가 서게 되는 자리가 묘하다. 화가 난 채로 사과하고, 또 변명하고 방어한다. "야구선수는 야구만 잘하면 되는 거 아니냐" "그만 좀 해라. 너희 팀은 뭐 얼마나 깨끗하냐" 궁색한 줄 알면서도 그런 말들을 쏟아낸다. 내 가족이 못난 짓을 해도 남이 하는 욕을 듣기는 힘든 마음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렇게 흘러온 시간이 40년을 넘다 보니 10개 팀 중 지금껏 내내 예외였던 팀은 없다는 것. 잠깐 서로 날을 세우고 할퀴지만,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다는 것도 다들 안다. 그래서 또 사나흘만 지나면 궤변을 늘어놓던 이들이, 자성을 외치고 조롱하던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대화합의 장이 열린다. 그리고 그렇게 아문 상처는 곧 굳은살이 되어, 또 언젠가 사고 칠 누군가를 견딜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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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떡볶이, 치킨, 잔디밭, 시원한 여름밤의 기억이 홈런과 삼진과 우승 따위의 단어로 스며들면서 아이들은 야구팬이 되어간다 |
| ⓒ 김은식 |
사람과의 관계를 돌아볼 때마다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마음에서 잘라낸다는 건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까지 지우는 일이다. 그래서 이별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그와 함께했던 사소하지만 익숙한 순간들을 떠올린다. 커피 자판기 옆에 서서 나누던 잡담들, 라면 한 젓가락에 옥신각신하던 순간들. 내 삶에서 그 별것 아닌 시간들까지 함께 지워질 것 같다는 아쉬움이 그 별것 아닌 사람을 붙잡는다.
야구라는 게 남들 보기엔 기껏해야 '남는 시간 즐겁게 보내는' 방편이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다. 하지만 정이 뚝 떨어져 마음 접으려는 순간 오히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이미 내 삶과 엉겨 붙은 한 덩어리라는 사실이다. 비가 퍼붓던 날 우산도 없이 친구들과 흠뻑 젖은 스탠드에서 경기를 시작하라고 고래고래 악을 쓰다가 TV 중계방송에 잡혀 전화기에 불이 났던 날. 지루했던 어느 수요일 하루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았던 우아한 홈런의 궤적. 시험에 떨어졌던 날 밥 먹을 힘도 없이 곁눈으로 보던 야구 중계에서 끔찍한 끝내기 역전패를 당하는 꼴을 보고 욕지기를 쏟아놓고는 문득 허기를 느꼈던 날. 별 값어치야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삶에서 도저히 잘라낼 수 없는 묘한 기억들이 하필 야구와 엉켜있다.
사고 친 선수 하나를 마음에서 지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한다. 욕하고, 등 돌리고, 마음에서 그 이름을 지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팀을 버리면, 혹은 야구를 버리면 그렇게 못난 소리 해대고 마음 상해가며 버텨냈던 시간마저 흐려질 것 같아 차마 그러지를 못한다.
그래서 팬은 남는다.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떠나는 순간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두려워서다. 돌아볼 때, 삶이란 가치 있고 유용한 것보다는 아무 쓸데없지만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고, 하필 야구라는 게 꼭 그렇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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