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역사·전설 넘나들며 단종과 정순왕후 발자취 따르자 스며드는 애달픈 여운
누적 관객수 약 1600만 명.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가 지난 2월 4일 개봉 근 한 달만인 3월 6일 오후 6시 33분께 1000만 관객을 넘긴 후에도 흥행세가 꺾이지 않고 있습니다. 왕사남은 2024년 ‘파묘’(1191만 명) ‘범죄도시4’(1150만 명) 이후 2년 만이자 외화 포함 국내 개봉 영화 중 34번째, 한국 영화 중 25번째이자 사극 4번째로 천만 영화에 등극했는데요. 개봉 40일째 1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 최다 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2023년·1312만)과 '베테랑'(2015년·1341만 명)을 제쳤고요. 이어 45일째 1400만 돌파 후 이틀 만에 1475만을 넘기며 국내 박스오피스 공식 통계 기준 ‘명량’(2014년·1751만 명)·‘극한직업’(2019년·1626만 명)에 이어 흥행 전체 3위로 올라섰죠. 영화 흥행에 힘입어 작품의 배경이나 등장인물과 관련된 사적지 등 역사가 지우려 했지만 끝내 남은 흔적들을 찾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도 그 흐름에 동참했죠.

왕사남은 계유정난이 조선을 뒤흔들고 난 5년 뒤인 1457년, 강원도 영월 산골 마을의 부흥을 위해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려던 광천골 촌장 엄흥도와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단종 이홍위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사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년 단종의 이야기는 그동안 다양한 콘텐트로 만들어졌죠. 그만큼 남녀노소 누구나 공감하기 쉬운 역사적 사건을 다뤄 조손 3대가 같이 볼 수 있는 영화이자 교육적 효과도 있다는 입소문이 나며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영화관을 찾은 발길은 실제 역사적 장소들로 이어졌습니다. 단종의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 방문객은 영화가 개봉한 지난 2월 3만8223명으로 전년 동월(4763명)의 약 8배에 달하고, 단종의 무덤인 장릉 역시 2만6578명이 방문해 전년 동월(2917명)보다 약 9배 뛰었어요. 또 역사 공부로도 이어져 국립중앙도서관의 도서 대출 데이터에 따르면 단종·세조 관련 도서의 대출이 늘었고, 도서 판매업체 예스24에 따르면 단종 관련 도서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565.4% 증가했죠.
역사 속 단종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단종은 어떤 왕이었을까요. 단종의 통치 기간은 3년 2개월에 불과하고, 『조선왕조실록』의 단종 시기 기록은 세조 대 편찬(당시 실록이 아닌 노산군일기로 쓰여 숙종 때 단종실록으로 개칭)되다 보니 미심쩍은 부분도 있는데요. 실록에 따르면 단종 이홍위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외아들이자 세종대왕의 맏손자로 1441년(세종 23) 7월 23일(이하 날짜 음력) 태어났어요. 당시 세종은 장년의 나이가 된 세자(문종·1414~1452)가 드디어 후사를 본 기쁨에 대사면령을 내리기도 했는데요. 적손을 낳은 권씨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죠. 이에 세종은 소헌왕후와 의논해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해요.
문종 또한 세종의 맏아들이었으니 단종은 유교적 질서를 내세워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한 조선의 왕위 계승자 0순위였습니다. 1448년(세종 30) 4월 3일 의정부의 청으로 8세 나이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2년 뒤인 1450년 7월 20일 문종이 즉위하면서 바로 왕세자가 되죠. 1445년(세종 27)부터 세자로서 섭정하면서 정치 경험을 쌓고, 학문을 좋아해 『고려사』 개찬과 『고려사절요』 편찬 등에 참여했으며, 군사제도를 개편하고, 천문·역수·산술·서도에도 능했다는 문종은 그러나 재위 2년 4개월 만에 38세 나이로 병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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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근정문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서울 종로구)의 중심 건물 근정전의 남문으로 보물로 지정됐어요. 1395년(태조 4) 경복궁을 세울 때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1867(고종 4)년 다시 지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좌우로 뻗은 행각이 근정전의 둘레를 크게 직사각형으로 감싸죠. 1452년 5월 18일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했습니다. 상중에 엄숙하게 치르는 즉위식이라 근정전이 아닌 근정문에서 열린 거죠. 근정문에서는 단종을 비롯해 성종·명종·선조·경종 등 5명이 즉위식을 치렀습니다. 반면 살아있는 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세조는 근정전에서 즉위했어요.
」
열두 살 소년은 조선의 6대 왕이 됐죠(1452년 5월 18일). 『단종실록』 즉위년에 실린 교서와 『논어』 강론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는데요. 즉위 시 반포한 교서를 보면 어린 나이에 외로이 상중에 있으면서 애통한 마음이지만, 대소 신료들에게 정치를 보좌할 것을 주문하며 민생을 소생하고 모든 조처는 의정부·육조와 서로 의논하여 시행하겠다는 등 합당히 행할 일들을 조목조목 열거했죠. 또 경연 때 왕이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묻자 박팽년이 “생각하는 바에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니, 마음이 바름을 일컫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미 바르면 모든 사물(事物)에서 모두 바름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고, 이어 박중손이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아니하면서 만백성을 바르게 하려고 하면, 그 명령하는 바를 어기지 아니하는 일이 드물 것”이라 덧붙였다는데요. 공자의 ‘사무사’는 후에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도 그 실천을 강조한 바 있죠. 이들 일화는 단종이 왕으로서의 마음가짐과 정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음을 보여줘요.
단종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 고명대신이 측근에서 보좌하고,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종의 부탁을 받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신숙주·이개·유성원 등이 보필했습니다. 다만 단종의 왕권이 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고명대신 등 신하들이 나랏일, 특히 인사를 좌지우지하면서 불만이 쌓여갔어요. 세종은 적자로 문종 외 수양·안평·임영·광평·금성·평원·영응의 일곱 대군을 뒀는데요. 둘째 수양이 1453년(단종 1) 권람·한명회 등 측근들의 계책에 따라 자신과 대립 구도를 형성했던 안평을 추대해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으로 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을 전부 죽이고 안평대군 또한 강화도로 보냈다가 며칠 후 사사하죠. 이게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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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평대군 이용 집터

시·문·서·화에 모두 뛰어났던 ‘예술가’ 안평대군이 1만 권의 책을 갖추고 선비들과 함께 시를 즐겼던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정사’ 자리입니다. 커다란 바위에 큰 현판 모양으로 안평대군의 글씨로 전해지는 ‘무계동(武溪洞)’(사진)이 새겨져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죠. 안평이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은 1453년 이후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았어요. 1974년 '무계정사'로 서울 유형문화재에 지정됐다 2003년 무계정사지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습니다.
사육신묘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이들 중 사육신이라 불리는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하위지·유성원의 묘로 서울 동작구 사육신역사공원 내 있습니다. 민간에 전해오던 육신묘를 숙종 때 공식적으로 인정해 서원을 세웠으며, 정조 때 신도비를 건립하죠. 1977~1978년 서울시의 사육신 묘역 정화 공사 때 원래 있던 박팽년·유응부·이개·성삼문의 묘에 하위지·유성원와 함께 김문기의 가묘(假墓)를 더하고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의 불이문을 세웠습니다. 계유정난부터 단종 복위운동까지 다룬 사육신역사관도 마련됐죠.
수강궁

상왕이 된 단종이 머문 수강궁은 현재의 서울 종로구 창경궁입니다. 수강궁은 1418년 즉위한 세종이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위해 지었죠. 이후 1482년(성종 13) 대왕대비인 정희왕후(세조의 비)와 인수왕대비(소혜왕후·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를 추존한 덕종의 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가 수강궁에 거처하게 되자 이듬해 확장공사를 실시, 창경궁으로 거듭납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16년(광해군 8)에 중건,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내전이 소실돼 복구,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소실됐다 중건하길 반복했으며, 일제에 의해 유원지로 격하돼 크게 훼손됐죠. 1980년대 일부 복원된 창경궁은 사적 제123호로 지정됐어요.
」
이후 수양대군은 실권을 잡고 계유정난 당시 명망은 있으나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던 정인지 등을 정난공신으로 삼으며 중앙은 물론 지방에도 자기 세력을 심어요. 1455년에는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궁인 등을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등 남아있던 단종의 측근들을 제거해 고립시키죠. 결국 단종은 견디지 못하고 왕위를 물려주고(윤6월 11일) 상왕이 되어 수강궁으로 옮겨 가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한 이들이 1456년(세조 2) 단종 복위를 꾀했으나, 김질의 배신으로 실패하며 사육신 등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요. 얼마 후엔 단종의 장인 송현수와 후궁 권씨의 아비 권완을 반역을 도모했다며 옥에 가두고, 단종 역시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로 유배하죠(세조 3년 6월 22일). 앞서 1455년 삭녕·광주로 유배됐던 금성대군은 이즈음 경북 영주 순흥에 안치되는데, 1457년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 의병을 모의했다 관노의 고발로 실패, 반역죄로 처형당해요.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봉됐다 10월 죽임을 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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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서강이 휘돌아 삼면이 물이고, 뒤로는 험준한 육육봉이 솟아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육지 속의 섬입니다. 산림청이 ‘천년의 숲’으로 지정한 청령포 소나무 숲에 들어가면 단종이 머문 집을 재현한 단종어소가 있죠. 그 옆엔 단종의 유배지임을 알리는 단묘유지비, 백성의 출입을 금하는 금표비가 있으며 어소를 향해 몸을 낮춘 ‘엄흥도 소나무’가 자리해요. 숲속에는 단종의 슬픔을 ‘보고 들었다’는 이름을 가진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이 우뚝 섰고, 육육봉 전망대로 가는 길엔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와 아내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망향탑도 있죠.
소백산 고치령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 단종과 경북 영주에 유배된 금성대군 이유 사이 거리는 약 50km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이에는 760m 높이의 고치령이 있는데요. 고치령 정상에는 소백산신과 태백산신을 모시는 산령각(사진)이 있어요. 단종이 폐위된 뒤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단종(태백산)과 금성대군(소백산)을 함께 산신으로 기립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조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금성대군을 기리는 금성대군 신단(사진)은 금성단이라고도 하며, 금성과 뜻을 함께한 순흥부사 이보흠과 유림들도 추모하는 곳입니다. 단종 복위운동이 발각돼 순흥도호부와 함께 폐지됐다가 1683년(숙종 9)에 복원된 순흥향교도 근처에 있어요.
」
『세조실록』에 따르면 역적을 벌하라는 왕실 종친과 신하들의 간청이 이어져 왕이 고민 끝에 금성대군과 송현수를 사형에 처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기에 예로써 장사지냈다고 하는데요. 지금까지 단종에 관해 전해오는 많은 야사와 설화들을 보면, 『세조실록』의 기록은 거짓으로 보입니다. 『선조실록』에는 단종에 사약을 내린 증언이, 『숙종실록』엔 금부도사 왕방연이 주저하자 모시던 이가 자청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또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이 펴낸 『연려실기술』엔 단종의 시신을 아무도 매장하지 못하고 강에 흘려보냈으며,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뒤따라 동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영월 호장 엄흥도가 한밤중에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동을지산으로 올라갔는데, 눈보라 속에서 사슴이 앉았다 사라진 곳을 보니 눈이 쌓이지 않았기에 그곳에 매장하고 식솔들과 자취를 감추었다는 야사가 유명하죠. 엄흥도가 단종의 장사를 지냈으며,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고 부르더라는 내용은 중종 때 묘역을 정비하고 봉분을 갖추게 되며(1516년·중종 11) 실록에 기록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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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풍헌

단종이 생을 마감한 곳은 청령포가 아닙니다. 청령포가 장마로 침수 위험에 놓이자 근처 관풍헌으로 옮겨 두 달가량 머물다 죽임을 당했죠.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갖고 내려왔으며, 단종이 익선관·곤룡포를 갖추고 나와 온 까닭을 물었으나 답을 못하자 심부름꾼 하나가 자청해 좌석 뒤의 창문으로 끈을 잡아당겼다고 하죠. 뒤이어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강에 몸을 던졌다는 야사 속 낙화암은 현재 영월군의 봉래산명소화사업으로 인해 훼손 논란이 있습니다.
장릉

단종의 묘인 장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하나입니다. 영월군은 1967년부터 장릉에서 단종문화제를 열었는데요. 59회째를 맞는 올해 단종문화제는 4월 24∼26일 열릴 예정이죠. 장릉 제례와 민속신앙, 칡 줄다리기, 국장 재현을 통해 단종의 영면을 기원할 계획입니다. 또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못다 한 인연을 기리는 국혼, 단종이 유배지인 청령포로 들어가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 등을 마련해요.
보덕사

비극적 최후를 맞은 단종은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전설과 함께 민간에서 오랫동안 숭배됐습니다. ‘단종대왕신’은 영월·태백산 일대의 사당·절·서낭당에서 유교·불교·무속을 넘나들며 기려지는데, 장릉의 원찰로 지정된 보덕사에도 태백산신으로 추앙된 단종의 무신도(사진)를 모신 산신각이 있죠. 백마를 탄 단종과 머루를 든 우천 추익한이 함께 그려진 무신도에는 야사가 전해요. 유배온 단종을 남몰래 위로해온 추익한이 귀한 머루가 생겨 진상하러 가는 길에 백마를 탄 단종을 만났는데, 대왕마마 어디로 행차하시나이까 묻자 태백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대답했다는데요. 어소에 와보니 단종이 승하한 뒤라 애통해하다 죽었다는 이야기죠. 장릉서 도보 5분 거리인 보덕사에선 단종어각을 세워 단종 어진과 위패를 봉안했고 2003년부터 ‘단종 추모 영산대재’를 봉행합니다.
」
이후 1681년(숙종 7)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복위가 결정돼 단종과 정순왕후의 묘호를 추증해 종묘에 모시죠. 능묘 역시 장릉(莊陵)으로 격상됐어요. 왕릉은 수도 한양에서 100리 이내에 두는 것이 관례지만, 장릉만 예외죠. 1733년 영조는 장릉에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새긴 표석을 세웠는데, 단종이 죽음에 이르게 된 내력은 표기하지 않았어요. 이후 단종에 대한 엄흥도의 높은 충렬을 인정해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자리가 내려졌고, 장릉 경내에 ‘엄흥도정려각’이 세워졌죠.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도 마련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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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흥도 묘소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사라진 엄흥도는 ‘충의공실기’ ‘영월엄씨파보’ ‘영월엄씨대동보’ 등 문헌과 구전에 따르면 대구 군위군에서 도피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충의공’ 엄흥도의 묘 역시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조림산에 있죠. 군위군에선 충의공 엄흥도 역사탐방로(사진)를 만들었어요.
」
단종과 정순왕후
단종은 1454년 정월, 수양의 추천으로 그와 친밀했던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책봉했습니다. 정순왕후 송씨(1440년 3월 12일~1521년 6월 4일)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씨의 딸로 전북 정읍 태인에서 태어났어요. 열다섯 살 신부 송씨와 한 살 어린 남편 홍위의 즐거운 신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부부가 된 다음 해인 1455년(단종 3)에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되자 송씨는 의덕왕대비가 되죠.
1457년(세조 3)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며 정순왕후도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각자 영월로 한양도성 밖으로 쫓겨납니다. 정순왕후는 흥인지문(동대문) 밖 낙산자락에 살면서 매일 뒷산 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을 그리워했죠. 단종과 이별한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김도연·김은제·박세아 학생기자가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에서 홍미영 해설사와 만났어요.

“궁에서 쫓겨나 더는 왕비도 아니고, 폐서인돼 관비 신분으로 아버지도 남편도 잃고 홀로 살게 된 정순왕후는 옷감을 짜고 물들여 생계를 꾸렸다고 하는데요. 그녀가 옷감을 샘물에 담그면 자줏빛으로 염색이 됐다고 하는 자주동샘이 있습니다. 자주우물이라고도 불러요. 염색한 천을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자줏빛 풀이 자라는 샘물이라는 뜻의 ‘자지동천(紫芝洞泉)’이 새겨졌죠. 또 정순왕후가 거북이를 탄 단종이 승천하는 꿈을 꾼 다음 날 거북바위가 나타났다는 전설도 있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정순왕후처럼 정업원을 나와 동망봉에 올랐죠. 정순왕후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영월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며 통곡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려 마을 여인들이 함께 곡을 했다고 합니다. 동망봉 표지석은 영조가 친히 동망봉이라는 글을 써서 이곳 바위에 새기게 했으나 일제강점기 채석장으로 쓰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알려줬어요. 크게 훼손된 동망봉의 남은 능선은 현재 숭인근린공원으로 조성됐습니다.



동행취재=김도연(서울 원명초 6)·김은제(서울 역삼중 1)·박세아(서울 목동초 5)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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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 영녕전

1698년(숙종 24) 단종이 왕으로 신분이 회복되자 정순왕후도 복위됐습니다. 묘호를 단종(端宗), 시호를 정순(定順)으로 정해 종묘에 신주를 봉안했죠. 단종 사후 241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다시 함께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의 신주를 종묘 영녕전(사진)에 부묘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단종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로 기록됐어요.
사릉

정순왕후 송씨는 평생 단종을 기리며 살았어요. 혈육 없이 나이가 들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자녀이자 유일한 조카인 해평부원군 정미수(1456~1512)에 의탁했죠. 1521년(중종 16) 정순왕후가 82세에 노산군부인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정미수의 해주정씨 선산에 묘소가 조성됐는데 바로 경기도 남양주 사릉(思陵)입니다. 1698년(숙종 24)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되고 1699년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이때 사릉 주변 해주정씨 묘역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이 해주정씨의 의리를 생각해 그대로 남겨뒀죠. 사릉의 소나무가 영월 쪽으로 가지를 뻗어 자랐다는 야사도 전하는데요. 1999년 사릉의 소나무 한 그루를 장릉 단종 능침 앞에 옮겨 심고 정령송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단종애사 정순왕후 숨결길

소중 학생기자단처럼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따라 걸을 수 있어요. 서울 종로구에서 운영하는 골목길 탐방 해설 프로그램 중 숭인동 코스를 고르면 되죠. 3인 이상 신청 시 해설사가 배정되며 종로문화플랫폼 홈페이지에서 예약할 수 있습니다
」
■ 소중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정순왕후의 발자취를 따라 소중 학생기자단 첫 취재를 했습니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간 뒤 궐 밖에서 살았죠. 먼저 정순왕후가 염색업에 활용한 자주동샘을 보러 갔어요. 정순왕후가 여기서 빨래하니 모두 자줏빛으로 염색됐고, 그 옷감을 사람들이 일부러 사줬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간 청룡사에선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옛터라는 걸 알고 만들었다는 비석을 봤죠. 영조 글씨로 비석엔 정업원구기, 현판엔 전봉후암어천만년이라 쓰였죠. 단종이 죽은 뒤 정순왕후가 아침저녁 울었다는 동망봉에도 올랐어요. 마지막으로 간 영도교에서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별한 후 다시 만나지 못해서 다리의 이름이 영영 이별이라는 뜻이 됐다고 들으니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이별한 뒤 여생을 혼자 보낸 정순왕후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김도연(서울 원명초 6) 학생기자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감명 깊게 본 터라 잘 몰랐던 정순왕후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된 이번 취재가 인상 깊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영월로 유배 간 단종도 안쓰럽지만 정순왕후도 단종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았죠. 이번 취재에서는 정순왕후의 삶의 흔적을 찾아가며 그때를 회상했어요. 걷는 것이 좀 힘들었지만 해설사 선생님과 함께 둘러본 곳 모두가 재미있고 뜻깊었죠. 그중 여인시장 터가 가장 좋았습니다. 한때는 중전이었던 정순왕후가 폐위돼 시장에 물건을 팔러 나간다는 것이 짠하고도 대단하고, 그를 위했던 백성들의 고운 심성에 감동했습니다. 또 영도교에 갔을 땐 유배 가는 단종을 배웅하는 정순왕후를 생각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어요.
-김은제(서울 역삼중 1) 학생기자
평소 역사를 좋아하는데요. ‘왕과 사는 남자’ 영화를 보고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해 궁금해졌죠. 이번 취재로 정순왕후의 삶의 모습이 남아있는 자주동샘·청룡사·여인시장 터·영도교 등을 다녀왔어요. 그중 영영 건넌 다리,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의 영도교가 인상 깊었던 건 정순왕후가 단종과 헤어질 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주동샘도 기억에 남는데, 정순왕후가 그곳에서 옷감을 염색했다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로워서죠. 정순왕후는 옷감을 자주색으로 물들여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인들이 정순왕후를 위해 만들었다는 여인시장 이야기에 감동했죠. 여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시장을 통해 도와줬던 여인들 덕분에 정순왕후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을 거예요. 성품이 어진 정순왕후는 매일 2번씩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의 삶을 알수록 정순왕후가 정말 대단한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박세아(서울 목동초 5) 학생기자
」
글=김현정 기자, 사진=박종범(오픈스튜디오)·중앙포토·국가유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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