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유명 OTT에 “날 인터뷰 하라”…‘허세왕’으로 끝난 마약왕

정영교 2026. 4. 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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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 교민 3명 살해, 탈옥, 국내 마약 유통 등을 일삼으며 '마약왕'으로 불리던 박왕열 씨가 지난달 2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국내로 송환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필리핀에서 한국인 3명을 살해한 뒤 현지 교도소에서 국내로 마약을 유통했던 박왕열(47)이 자신의 악명을 듣고 모여든 이들을 마약 유통책으로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수사 당국은 그의 필리핀 현지인 여자친구도 범죄 수익을 가상자산 등을 통해 은닉해 관리하는 공범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5일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4일 필리핀 마닐라 동포 간담회에서 “교도소 안에서 애인도 불러서 논다”고 언급했던 현지인 여자친구의 경우에는 단순한 연인 관계가 아닌 범죄 조력자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해당 여성이 이미 수사 선상에 올랐다는 의미다. 한국에 체류 중인 박왕열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로 범죄 수익금을 은닉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수사 당국의 판단이다.

또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애초에 박왕열의 현지인 여자친구의 존재를 파악하게 된 건 정보 자산을 동원한 결과라고 한다. 실제로 국가정보원은 2020년부터 ‘박왕열 전담추적반’을 만들어 국내 마약 밀반입 등의 범죄행위를 추적해 왔고 이번 송환 과정에서도 막후 역할을 충실히 했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필리핀 산호세 공항에 '마약왕'으로 불리던 박왕열 씨가 도착하는 모습. 법무부 제공, 연합뉴스

박왕열이 호화 수감 생활을 누려왔던 ‘뉴빌리비드 교도소’는 물론 통신환경이 취약한 ‘사블라얀 교도소’에서도 휴대전화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정보자산을 통해 파악됐다고 한다. 박왕열은 휴대전화를 통해 국내로 마약 공급을 공모하고, 주기적으로 여자친구를 교도소 내부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특히 박왕열은 각종 언론매체 노출로 얻은 악명을 활용해 자신을 먼저 찾아온 한국 국민을 싼값에 ‘자발적인 마약 유통책’으로 활용한 사실도 드러났다. 교도소로 면회를 온 사람들을 이용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유통책을 모집, 마약 밀매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박왕열의 지시로 2024년 6월 국내에 마약을 반입한 한국인 A씨는 필리핀 민도로섬을 방문해 그와 접촉해 범죄를 저질렀다. 2024년 7월 국내로 필로폰 3.1㎏을 밀반입한 한국인 B씨의 경우에도 박왕열이 수감돼있었던 민도로섬 ‘사블라얀 교도소 형벌 농장’를 방문한 후 범죄에 가담했다.

국가정보원 원훈석. 사진 국정원 제공

박왕열의 자아도취적 성향도 드러났는데, 그는 호화 수감 생활 중에 각종 범죄 행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는 유력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관계자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자신을 인터뷰하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해당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이는 그가 사법제도를 얼마나 우습게 여겼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다만 “내가 입 열면 검사 여럿이 다친다”며 허세를 부리던 그가 실제로는 국내 송환을 막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법무기 소지 등 필리핀 국내법 위반으로 현지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하는 사건들을 고의로 일으켜 현지에 계속 남으려 한 정황이 국정원의 첩보망에 걸렸다는 것이다.

지난달 25일 박왕열의 국내 송환이 이뤄지는 과정에서는 지난해 12월 이재명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법무부·외교부·경찰청·검찰청·국정원 등을 중심으로 출범한 ‘초국가범죄 특별대응 TF’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캄보디아 스캠 범죄 대응을 위해 출범한 조직이 동남아 현지에서 스캠과 마약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범죄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조사 대상을 보 폭넓게 들여다본 결과다. 현지에서는 주필리핀 한국 대사관이 분주히 움직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월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 있는 초국가범죄 특별대응 TF 사무실을 격려 방문해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연합뉴스

TF는 박왕열의 범죄 혐의와 범죄수익금, 호화 수감 생활 등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필리핀 당국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편 이 대통령의 송환 추진 결심을 받아냈다고 한다. 이는 사실상 올 초부터 준비된 작업으로, 관련 당국자들은 설 연휴도 반납하고 박왕열 송환 준비에 매진했다. 한·필리핀 정상회담이 박왕열을 데려올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라는 게 TF의 인식이었다.

준비상황을 보고받은 이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문제 제기를 하겠다고 결단했고, 지난달 3일 필리핀 국빈 방문 당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박왕열의 ‘임시인도’를 요청하면서 국내 송환은 성사됐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대통령을 필두로 외교부와 수사·정보기관이 원팀으로 이뤄낸 결과”라면서 “국내외 범죄조직에게 ‘대한민국을 건드리면 끝까지 추적한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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