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기둥 수천 개가 삐죽삐죽, 태어나서 처음 본 붉은 숲

문진수 2026. 4. 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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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서부 탐방기 ④] 고원과 별들이 펼쳐진 하늘 공원, 브라이스 캐니언

낯선 세상을 향한 동경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지 모릅니다. 인공의 때가 덜 묻은 원시의 자연을 느끼고 싶어 2026년 3월 3일부터 10일까지 미국 중서부 지역의 협곡(canyon)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현지에서 보고, 관찰한 것들을 토대로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자말>

[문진수 기자]

브라이스 캐니언(Bryce Canyon)은 유타주 남부에 있는 국립공원으로,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도에 자리하고 있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커서 영상과 영하를 넘나드는 날이 1년 중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날씨가 건조하고 빛 공해가 없어서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선명히 관측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브라이스 캐니언 국립공원 위치 (구글 지도) : 유타주 남부 고산지대에 있다
ⓒ 문진수
이 협곡은 후기 성도교회로 알려진 모르몬교(Mormonism)와 관련이 깊다. 브라이스라는 지명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모르몬교 개척자였던 에벤에져 브라이스(Ebenezer Bryce)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곳에 정착해 교회를 세우고 농장을 일구었다고 한다. 현재 유타(Utah) 주민의 상당수가 모르몬교 신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

해발 2530미터. 페이지에서 두 시간 반을 달려 브라이스 캐니언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3월 초의 날씨가 무색할 만큼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눈앞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기둥이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게 아닌가.

이곳을 '돌기둥으로 가득 찬 고원(plateau)'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기둥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토사가 쌓여 굳은 해저의 퇴적층이 솟아 오르면서 고원이 됐고, 바위 속에 스며든 빗물이 얼면서 돌을 부수고, 부서진 흙을 바람이 깎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수천 개의 바위 기둥이 형성됐다고 한다. 넓은 협곡에 기둥이 잇대어 서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 일출(sunrise) 포인트에서 바라본 협곡 전경 : 물과 바람, 시간이 조각해 낸 작품이다
ⓒ 문진수
이 바위 기둥을 '후두(Hoodoo)'라고 하는데, 원주민 말로 '무섭고 두려운 존재'라는 뜻이다. 이 지역 원주민인 파이우트(Southern Paiute)족은 이곳을 '붉은 바위들이 숲처럼 서 있는 곳'이라 불렀다. 본래 이 기둥들은 인간이었는데, 나쁜 짓을 하다가 신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바위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브라이스 캐니언에는 총 13개의 전망대가 있는데, 그중 원형극장(Amphitheater)을 조망할 수 있는 브라이스 포인트(Bryce point)가 으뜸이다. 해가 뜰 때, 잠에서 깨어나는 후두의 모습이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돌기둥이 밀집된 형태로 모여있어서 '침묵의 도시(The Silent City)'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기둥들이 광장에 모여 회합을 가지는 것 같다.
▲ 브라이스(bryce) 포인트에서 바라본 협곡 전경 : 침묵의 도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 설지원
브라이스 캐니언은 그랜드 캐니언과 달리 골이 깊지 않아서 어려움 없이 탐방로(trail)를 걸을 수 있다. 비교적 완만한 경로(Queen's Garden Trail)를 선택해 협곡을 둘러보기로 했다. 경사진 길을 내려가며 살펴보니, 아래쪽에서 바라보는 협곡의 모습은 위에서 조망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기둥의 형태와 질감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린다고 할까.
▲ 퀸스 트레일(Queen's trail) 아래에서 바라본 바위기둥 : 기둥의 형태와 질감이 확연히 느껴졌다
ⓒ 문진수
기둥마다 색깔과 모양, 질감이 제각각이었는데, 손으로 만져보니 무척 단단했다. 이 기둥들이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바람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자연을 조각하는 예술가가 틀림없다. 침식 작용으로 흙이 깎여나가 뿌리가 겉으로 드러난 나무들이 많았는데, 흙을 움켜쥐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겉으로 뿌리가 드러난 소나무 :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숨 쉬고 있었다
ⓒ 문진수
이곳을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면, 협곡 아래를 걸어보시기 바란다. 자연이 창조한 예술 작품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2시간 남짓 순례를 마치고 나니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공연을 마친 무대에 가림막이 내려오는 것처럼, 기둥들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바람의 온도가 달라지고 추위가 밀려올 무렵,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전망대를 내려왔다.
▲ 썬셋(sunset) 포인트에서 바라본 일몰 풍경 : 무대 위에 암영이 깔리는 것처럼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 설지원
▲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포인트에서 바라본 협곡 전경 :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울려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 설지원
진짜 밤하늘의 모습

늦은 저녁, 별을 관찰하기 위해 공원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를 찾았다. 공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퇴근한 뒤라 주차장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캄캄한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검은색 도화지에 흰색 물감을 흩뿌린 것만 같다. 아, 이게 밤하늘의 진짜 모습이구나.

이토록 영롱한 별빛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황홀한 순간이었다.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행은 오랫동안 별에 취해있다가 밤늦게 숙소에 돌아왔다. 북반부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은 지구에서 8.6광년 거리에 있는 시리우스(Sirius)라고 한다. 우리가 본 빛은 8.6년 전에 우리가 사는 행성에서 수십 조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별이 보낸 인사였던 셈이다.
▲ 공원 방문자 센터(visitor center) 주차장에서 바라본 밤하늘 : 무수한 별들이 점처럼 하늘에 박혀 있었다
ⓒ 설지원
도시에 사는 우리는 이제 별을 볼 수 없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들은 하늘을 우러러 별을 살피는 대신, 고개를 박고 휴대전화를 바라본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별들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라는 어린왕자 이야기는 새로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별은 영영 인간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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