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은 무대, 걷는 나는 관객이자 배우…체험형 퍼포먼스 ‘리모트 서울’
헤드폰을 통해 전달된 인공지능(AI)의 목소리를 따라 공동묘지를 둘러본다. 지하철역 개찰구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바삐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손뼉을 치고 환호를 보낸다. 육교 위에 서서 일상적으로 지나치던 거리의 풍경을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계획된 AI의 지시와 낯익지만 예측 불가능한 풍경이 맞닿으며 도시는 편집되지 않는 거대한 무대로 바뀐다.

독일 창작집단 ‘리미니 프로토콜’의 ‘리모트 서울’이 지난 3일 개막했다. ‘리모트 X’ 시리즈의 서울 버전으로 30명의 참가자가 헤드폰을 쓴 채 AI의 음성 안내에 따라 2시간 동안 도심을 탐험하는 체험형 퍼포먼스다.
2013년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한 이후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브라질 상파울루, 러시아 모스크바 등 세계 65개 도시에서 진행됐다. 한국에서는 처음 선보였다.
지난 4일 공연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모인 관객들은 AI의 안내를 받으며 묘비 하나를 골라 자세히 살폈다. 어느 순간엔 손으로 쌍안경 모양을 만들어 마치 폐쇄회로(CC)TV 와 같이 주변을 180도 돌아봤다. AI의 지시를 꼭 따르지는 않아도 된다. 고개 돌려 옆 사람 얼굴을 바라보라거나, 에스컬레이터에서 발레 포즈를 취하라는 AI의 말에 겸연쩍어하며 따르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참가자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무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이동했다.

이 작품을 연출한 외르크 카렌바워는 이날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에서 기자와 만나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는 굉장히 흥미로운 무대”라며 “관객이 단체로 이동할 때 시민들의 협조 여부 등은 예상할 수 없다. 이런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가장 훌륭한 배우가 된다”라고 말했다.
각 도시의 특성은 이 작품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관객과 시민의 반응도 도시마다 다양하다. 예컨대 중국에서 이 작품이 진행했을 때 시민들은 어떤 문제에 휘말릴지 염려하며 참가자 무리를 피해갔다고 한다. 반면 인도에선 주변 행인이 자연스럽게 대열에 합류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만큼 카렌바워는 3주간 서울에 머물며 도시 지형을 비롯해 사회 문화적 배경, 시민들의 행동을 살폈다. 그는 “서울은 ‘리모트X’를 하기에 적합한 도시”라며 “대중교통이 시간에 맞춰 오고, 길거리나 차도에 언제 사람들이나 차가 많을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리모트 X’에는 없는 AI의 ‘리모트 서울’ 맞춤형 대사도 있다. ‘개성을 존중해야 하는지, 평등을 위해 규범을 더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이 대표적이다. 카렌바워는 “유럽에서는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이들이 많은 만큼 저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라며 “한국에서는 대중을 존중하고 나를 낮추는 모습이 많이 보여서 이 질문을 했다”고 설명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장소를 새롭게 바라보고 낯선 상호 작용을 느낀 2시간의 탐험 같은 공연은 끝난 뒤에도 여운을 남겼다. AI와의 관계를 새삼 돌아보게 되는 계기도 됐다. 이 작품에서 AI는 단순히 행동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 민주주의, 경쟁과 같은 가볍지 않은 주제의 질문을 수시로 던진다. 카렌바워는 “AI와 익숙해지며 AI와 친구가 되는 시대”라며 “AI가 우리의 꿈과 생각을 어떻게 좌우하는지도 생각해보고자 했다”라고 전했다.
‘리모트 서울’은 다음 달 10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진행한다.
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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