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부족하면 '메롱', 셔터를 거부하는 카메라
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기자말>
[이재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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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phone 15촬영 올림푸스 하프카메라 pen시리즈와 같은 외형이지만 35 숫자가 풀프레임이라는걸 알려준다. |
| ⓒ 이재필 |
한동안 카메라를 멀리하던 내 손에 Olympus Trip 35가 쥐여졌다. 배터리 없이 오직 셀레늄 광전지가 읽어낸 빛으로 노출을 결정하는 이 투박한 기계는, 어쩐지 그날 내가 향하던 산과 닮아 있었다. 산이라는 공간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하다. 갑자기 동물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누군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찰나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 장면을 붙잡기 위해서는 복잡한 설정으로 작동하는 카메라보다, 곧바로 반응할 수 있는 자동화가 지원된 카메라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작고 가벼운 몸체는 짧은 산행이라 할지라도 마음의 부담을 덜어준다. 아마도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먼저, 자연스럽게 손이 그 카메라를 향해 있었다.
나의 유년은 대구라는 거대한 분지에서 시작되었다. '분지'라는 단어는 교과서의 정의보다 몸의 감각으로 먼저 기억하는 구조였다. 고개를 돌리면 어디에나 산이 있었고, 그것은 풍경이라기엔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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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푸스 trip35촬영 일주문 앞 지인들과의 단체 사진 - 찌이익, 촥. 팔공산의 공기를 한 프레임에 담았던 시작점. |
| ⓒ 이재필 |
그중에서도 팔공산은 유독 묵직한 존재감을 지닌다. 해발 1192미터라는 숫자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수험생과 부모들의 간절함이 모이는 '염원의 산'이기 때문이다. 갓을 쓴 듯한 형상의 석조여래좌상, 즉 '갓바위' 부처님께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이야기는 수능 철마다 산 전체를 몸살 앓게 할 만큼 뜨거웠다.
나 역시 수능을 앞둔 어느 날, 등 떠밀리듯 그 가파른 길을 올랐던 기억이 있다. 간절한 소원보다는 차오르는 숨을 참아내며 '버티는 것'에 급급했던 시간. 그래서인지 내게 갓바위는 영험한 성지보다는 다시는 오르고 싶지 않은 고단한 장소로 각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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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푸스 trip35촬영 수십 년의 세월을 입을 벌린 채 버텨온 존재, 그 투박한 질감에 눈길이 머문다. |
| ⓒ 이재필 |
2026년 새해를 맞이한 지 석 달, 문득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불자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가까운 절 한 번 찾지 않았다는 부채감, 그리고 한 해를 무사히 보내고 싶다는 소박한 약속이 필요했다. 그렇게 지인들과 함께 다시 팔공산으로 향했다.
우리는 경산 와촌의 관음휴게소 코스를 택했다. 예전보다 산은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주차장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편리한 셔틀버스가 오갔지만, 나는 800미터 남짓한 길을 기꺼이 걷기로 했다. 길가에 늘어선 석등들이 마치 호위무사처럼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목에 걸린 Trip 35의 렌즈를 통해 빛을 읽으며 천천히 발을 뗐다.
이 카메라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ISO, 그러니까 필름 감도만 맞춰두면 이후에는 크게 신경 쓸 것이 없다. 거리 링을 통해 초점을 한 번 설정해두면, 그 이후에는 다시 맞출 필요 없이 그 감각 안에서 촬영이 이어진다. 클래식한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자동 노출에 맡겨두면 별도의 조작 없이도 충분히 작동하고, 사용자는 그저 거리를 가늠하는 일에만 집중하면 된다.
2.5미터, 5미터, 그리고 무한대. 대략의 감각으로도 충분하다. 이 방식은 불편하다기보다 오히려 직관에 가깝다. 팔을 뻗었을 때의 60~80센티, 한 걸음을 크게 내디뎠을 때의 1미터 같은, 몸에 익은 휴먼 스케일(인간의 신체를 기준으로 크기를 가늠하는 방식)만으로도 피사체와의 거리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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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푸스 trip35촬영 2.5미터 혹은 무한대. Trip 35가 가르쳐준 적당한 거리감으로 걷는 길. |
| ⓒ 이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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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푸스 trip35촬영 빨강, 파랑, 노랑. 필름 위에 현상된 봄날의 색채들. |
| ⓒ 이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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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푸스 trip35촬영 연등의 색깔만큼이나 다양한 소원들. 그 촘촘한 밀도 속에 잠시 머물다. |
| ⓒ 이재필 |
하산하는 길, 30년이라는 세월이 찰나처럼 겹쳐졌다. 너무 오랜만이라 '회귀'보다는 '처음'이라는 낯섦이 더 컸지만, 그 낯설음 덕분에 올해를 어떻게 살아갈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 곁에서 Trip 35는 묵묵히 제 역할을 다했다. 빛이 부족하면 붉은 '혓바닥'을 내밀며 셔터를 거부하고, 초점은 온전히 나의 감각에 맡겨지는, 어쩌면 불완전한 카메라. 하지만 그 정직한 제약 덕분에 나는 비로소 현재에 머물 수 있었다. 이 카메라가 건네는 신호는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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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림푸스 trip35촬영 어둠이 프레임이 되어줄 때, 비로소 산의 능선은 제 얼굴을 선명히 드러낸다. |
| ⓒ 이재필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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