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묵은 찻잎으로 우린 차, 진한 카카오향을 기대했는데

노시은 2026. 4. 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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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차의 아쉬움을 달래준 2009년산 복건성의 백호은침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어서 마감 끝내고 나도 벚꽃 꽃그늘 아래를 거닐고 싶다.
ⓒ 노시은
창밖은 온통 벚꽃 천지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희고 분홍빛인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하늘하늘 흩날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들 꽃그늘 아래서 사진을 찍고 웃으며 봄을 즐기는데, 마감에 시달리는 저는 바위가 되어 모니터 앞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네요. 한숨을 쉬며 달력을 보니 어느덧 '청명(淸明, 4월 5일)'이 다가옵니다.
 팡팡팡 시원하게 터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봄날.
ⓒ 노시은
겨우내 땅을 누르던 탁하고 무거운 기운이 걷히고, 만물이 맑게 깨어나는 눈부신 절기죠. 재미있는 건 고대 중국인들이 청명 무렵의 기후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하며 남긴 기록(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예기>(禮記)의 '월령(月令)' 편)입니다.
오동나무에 꽃이 피고, 무지개가 처음 보이며, 무엇보다 '들쥐가 메추라기로 변한다'고 하네요. 어둡고 축축한 땅속에 웅크려 있던 쥐가 맑은 봄기운과 양기에 취해 깃털 달린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니. 과학적 팩트 체크를 들이대면 황당한 소리지만, 그 엉뚱하고도 시적인 상상력에 픽 웃음이 나더군요. 지금 제 처지가 딱 굴속에 갇힌 들쥐 같아서 더 그랬나 봅니다.
 아직 만개하기 전에 만난 벚꽃. 꿀벌이 열심히 꽃가루를 모으고 있다.
ⓒ 노시은
하늘이 맑아진다는 청명, 차 마시는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집니다. 다서(茶書)들이 입을 모아 이맘때 최고의 호사로 '명전차(明前茶)'를 꼽기 때문이죠. 청명 전에 딴 아주 여리고 어린 찻잎으로 만든 녹차의 푸르고 서늘한 생기를 마시며 몸의 기운을 씻어냅니다. 이제 막 만들어진 명전차 한 잔이면 간이 맑아지고 눈이 밝아진다고도 해요.

하지만 프리랜서 작가의 현실은 언제나 냉혹합니다. 얇은 지갑을 털어 최고급은 수십만 원을 호가한다는 금값의 명전차를 선뜻 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죠. 분명 명전차를 들였을 차 친구네 집에 놀러 갈 시간조차 없음을 아쉬워하며, 오늘만은 특별한 차를 마시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백차(白茶)들만 따로 모아 익히고 있는 저만의 '보물창고'를 열기로 한 것이죠.

17년 전 사둔 차를 발견하다
 청명에 대해 알고 싶어 책을 펼치고 (요즘은 AI 덕분에 중국어로 된 책도 읽을 수 있다!) 찻자리를 준비한다.
ⓒ 노시은
먼지 쌓인 틴케이스 뚜껑을 열자 백차가 맛있게 익어가는 농밀한 단내가 풍겨와 행복해졌습니다. 병차(둥글게 압병한 차)들을 이리저리 파헤치다 구석에 처박힌 낡은 봉투를 무심코 열었는데, 무려 2009년산 복건성의 백호은침(白毫銀針)이 들어있지 않겠어요?

솜털이 보송보송한 은빛 찻잎들이 세월의 색을 입고 다소곳이 저를 맞이하더군요. 비싼 명전차 한 줌 못 구해 허덕일 줄 알고 미래를 내다본 17년 전의 제가 시공간을 초월해 남겨둔 구호물자가 틀림없었습니다. '과거의 나, 아주 격하게 많이 칭찬해!' 소리가 절로 나오더군요.

17년 전 차를 먹어도 될까, 염려하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오래 보관해도 되는 차들이 있습니다. 녹차나 오일을 사용해서 블렌딩한 차들은 오래 보관하면 산폐+쩐내가 나지만 백차, 보이차, 홍차, 일부 우롱차들은 오래 보관하며 마십니다. 우롱차 중에서도 사실 초록빛 청향 아이들은 되도록 빨리 마시는 게 좋지만요.

특히 백차는 1년이면 차, 3년이면 약, 7년이면 보물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묵히면 묵힐수록 좋습니다. 너무 습하거나 너무 건조하지 않은 곳에 잘 두면 차는 잘 익습니다. 저도 그렇게 보관했습니다.
 17년이나 지난 백호은침은 더 이상 푸릇하지 않고 농익은 붉은 갈색으로 변했다.
ⓒ 노시은
기쁜 마음으로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습니다. 4g의 소중한 찻잎을 담아내기 위해 투박한 질감의 다관과 깊은 속을 알 수 없는 흑유잔(黑釉盞)을 꺼냈습니다. 갓 피어난 녹차의 쨍하고 날카로운 기운도 훌륭하지만, 17년의 세월을 견디며 노백차(老白茶)가 된 백호은침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건넵니다.
 너무 사랑스러운 백호은침. 세월이 지나 찻잎 색깔이 변해도 복정백호은침 특유의 회백색 털의 색깔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 노시은
반전의 깊은 단맛

뜨거운 물을 붓자 가을 산의 마른 낙엽 냄새 같기도 하고, 은은한 한약재 같기도 한 묵직하고 달큰한 향이 피어오릅니다. 사실 17년이나 묵었으니 당연히 진한 카카오 향이 날 거라 예상했는데요, 막상 찻물을 입에 머금으니 예상과는 다른 반전의 맛이 느껴졌습니다.

카카오보다는 오히려 농밀한 감칠맛과 깊은 단맛이 혀를 부드럽게 감싸더군요. 이는 백차 특유의 테아닌(Theanine) 성분이 세월을 만나 응축된 덕분입니다. 쓴맛을 중화하고 신경을 이완시키는 테아닌 덕분에 마감의 압박으로 곤두섰던 신경이 기분 좋게 풀립니다.

호박색으로 짙게 우러난 찻물을 흑유잔에 쪼르르 따릅니다. 문득 백차는 오래될수록 플라보노이드(Flavonoid) 성분이 늘어난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항염과 항산화 효과가 뛰어난 플라보노이드가 17년 동안 찻잎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마감에 지친 제 몸의 피로를 씻어내 주는 든든한 보약이 되어주는 기분입니다.

차를 내렸으니 어울리는 다식을 찾을 차례입니다. 중국 절기 책에는 청명 무렵 찹쌀에 푸른 쑥즙을 넣어 빚은 청명과(淸明果)나 좁쌀 대추떡을 곁들이라 하더군요. 서늘한 차의 기운을 다독이는 지혜죠. 하지만 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노백차는 이미 그 자체로 따뜻하고 든든한 성질을 품었으니까요.
 천안의 명물 빵집에서 공수해온 돌가마 만주. 투박스럽게 생겼지만 놀랍게 맛있다.
ⓒ 노시은
대신 저는 돌가마 만주를 골랐습니다. 따뜻하게 데워 한 입, 그리고 17년 묵은 맑고 다정한 노백차 한 모금. 달지 않은 팥소와 고소한 견과류, 묵직한 버터의 맛이 백호은침의 깊은 여운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집니다.

따뜻한 찻물이 혈관을 타고 돌고 돌가마 만주가 위장을 채우자, 신기하게도 뻣뻣했던 어깨가 펴지고 몸이 가벼워집니다. 특히 오래된 백차에 들어있다는 테아크린(Theacrine) 성분의 진정 효과 덕분일까요?

카페인의 자극과는 반대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마감 때문에 심란했던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옵니다. 굴속에 웅크려 있던 들쥐가 맑은 봄기운에 취해 깃털 달린 새가 되어 뿅 하고 날아오르는 마법의 시간이 딱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햇살은 맑고, 차는 달며, 바람은 부드럽습니다. 자, 이 눈부신 기운을 빌려 남은 원고를 마저 훌훌 털어내야겠습니다. 그래야 저도 흩날리는 벚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쾌활한 메추라기가 될 테니까요.
 이제 막 벛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보름달이 뜬 봄날의 밤.
ⓒ 노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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