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없는 앙상블로 빚은, 장진표 블랙코미디의 진수 ‘불란서 금고’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2026. 4. 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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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7일까지 대학로 NOL 서경스퀘어

욕망에는 형체가 없다. 그러나 욕망이 부딪히는 곳에서는 반드시 파열음이 발생한다. 연극 ‘불란서 금고-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이하 ‘불란서 금고’)는 은행 지하 금고라는 폐쇄 공간에서 인간의 밑바닥 욕망이 충돌하며 내는 이 파열음에 집중한다. 10년 만에 신작 코미디로 돌아온 작가 겸 연출가 장진은 부조리한 상황과 엇박자 대사를 엮은 소동극 한가운데에 인간의 민낯을 올려놓는다.

ⓒ장차, 파크컴퍼니

극의 배경은 시설 공사로 정전이 예고된 자정 즈음의 은행 지하 금고다. 보안 장치가 해제되는 짧은 순간을 노리고 생면부지의 다섯 명이 모인다.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금고를 여는 것이다. 하지만 정전 시간이 다가오고 작전이 진행될수록, 이들이 금고 안에서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누군가는 눈앞의 재물을 좇고, 누군가는 권력을 탐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려 한다. 굳게 닫힌 금고는 이들이 품고 있는 허망하고도 그릇된 욕망을 투사하는 거대한 거울과도 같다.

작품의 뼈대를 지탱하는 것은 상황이 빚어내는 아이러니와 장진 연출 특유의 유머 코드와 ‘말맛’이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 금고를 여는 유일한 열쇠라는 설정부터가 모순이다. 프랑스산 금고의 교묘함을 탓하며 내뱉는 “나 아주 싫어해, 불란서” 같은 대사들은 심각한 상황 속에서 의도치 않은 폭소를 유발한다.

슬랩스틱이나 일차원적인 농담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들이 진지하게 몰두할수록 상황이 꼬여가는 구조 속에서 코미디가 발생한다. 핑퐁처럼 오가는 짧고 명료한 대사들은 연극적 리듬감을 극대화하며, 10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철학적 메시지를 직접 설교하는 대신, 치밀하게 설계된 상황 코미디 속에 인간의 어리석음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연출의 공이 크다.

ⓒ창차, 파크컴퍼니

이 촘촘한 대본을 무대 위에 완벽하게 구현하는 동력은 배우들의 빈틈없는 앙상블이다. 극의 중심에는 전설의 금고털이 장인, 맹인 역의 신구가 있다. 시력을 잃은 대신 예민한 청력을 얻은 그는 금고 안의 재물이 아니라, 다이얼을 돌릴 때 나는 마찰음 자체에 집착한다. 물욕에서 한 발짝 비켜선 채 금고를 여는 행위 그 자체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맹인의 모습은, 극 중 가장 엉뚱하면서도 초연한 존재로 기능한다. 신구는 특유의 발성과 농익은 연기로 무대의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교수 역을 맡은 장현성은 지성인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 속에 숨겨진 위선과 속물근성을 탁월하게 표현하며 긴장감을 부여한다.

주변 인물들의 앙상블 역시 극의 밀도를 끌어올린다. 밀수 역의 정영주는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대사 소화력으로 극의 템포를 역동적으로 조율하고, 건달 역의 주종혁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허술한 면모를 통해 긴장된 상황 속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은행원 역의 김슬기는 겉으로 보이는 친절함 이면에 서늘한 광기를 섬세하게 숨겨두며 입체적인 캐릭터를 완성한다. 극 후반부에 등장하는 ‘그리고’ 역의 조달환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등장해 극의 흐름을 뒤집는 ‘반전’을 쥐고있는 인물이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배우들은 서로의 연기를 튕겨내고 받아주며 완벽한 합을 이뤄낸다.

극을 보는 내내 인물들의 사투를 지켜보며 실컷 웃지만,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웃음의 잔상 대신 인간 본성의 씁쓸한 뒷맛을 마주하게 된다. 북벽에 오른 자가 봄을 베푼다는 의미를 담은 ‘북벽장춘’이라는 설정은 맹인의 첫 대사이자, 마지막 대사다. 각자의 봄을 찾아 탐욕의 금고 안으로 뛰어든 이들이 ‘욕망의 감옥’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과 달리, 물욕에서 비켜서 있던 맹인만이 금고 밖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원하던 봄을 만끽한다. 이 대비는 지금까지의 웃음이 관객의 내면을 찌르는 묵직한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이것이 장진표 웰메이드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공연은 6월 7일까지 NOL 서경스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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