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육성 투자해 400배 창출한 호주 정부...비결은 돈 아닌 ‘이것'

김연주 2026. 4. 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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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투자한 2000만 달러(약 280억 원)가 25년 만에 80억 달러(약 11조 원)로 불어났다. 원금의 400배에 달하는 경제 창출 효과다.

시안 프리스트 시카다 임팩트 및 생태계 총괄 임원은 “시카다는 설립 이후 500개 딥테크 벤처를 지원했고, 이들 기업은 총 65억 달러의 자금을 유치했으며 14억 달러 이상을 회수했다”며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매우 효율적인 스타트업 투자 성과”라고 평가했다.

시카다 이노베이션스 전경


호주 연방정부와 뉴사우스웨일스(NSW) 주정부가 2000년 시드니 에블리의 낡은 산업단지를 고쳐 세운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시카다 이노베이션스(Cicada Innovations) 이야기다. 시카다는 영어로 '매미'를 뜻한다. 오랜 시간 땅속에 머물다 세상 밖으로 나와 울음을 터뜨리는 매미의 생애는 긴 인고 끝에 성과를 내는 딥테크 스타트업의 여정을 닮았다.

시카다의 품에서 성장한 스타트업 가운데 9곳이 상장했고, 10곳은 대형 인수합병(M&A)을 통해 시장에 안착했다. 정부 주도로 스타트업의 기업공개(IPO) 성공 사례를 수차례 만든 것은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성과다. 이는 최근 대통령까지 나서 ‘창업’을 강조하고 있는 한국에도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저비용 수소 저장 기술을 개발하는 럭스 에너지의 제한 캉가 CEO(오른쪽)가 자사의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김연주 기자


지난달 24일 찾은 시카다 건물은 국내에서 흔히 떠올리는 코워킹 스페이스형 창업 센터와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복도 양쪽을 채운 것은 공유 책상이 아니라 각종 실험실이었다. 저비용 수소 저장 기술을 개발 중인 럭스에너지(Rux Energy)의 수소 저장 테스트 실험실은 전 세계에 4곳밖에 없는 첨단 시설이다. 이 중 3곳은 국가 연구소 소속으로,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곳은 시카다가 유일하다.

입주사들은 시카다의 인큐베이터로서 가장 큰 강점으로 ‘스타트업 전 생애주기에 걸친 맞춤 지원’을 꼽았다. 단순히 창업 공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실험실 지원은 물론 마케팅, 투자 유치, 상품화에 이르기까지 단계마다 기업의 필요에 맞춰 맞춤형 지원에 나선다는 것이다.

우주기술 스타트업 ANT61의 미하일 아사브킨 창립자가 자사 제품인 비콘(beacon)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연주 기자


기술을 보유하고도 아직 사업화에 이르지 못한 팀을 실제 기업으로 전환하는 역할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성 발사 직후 교신이 끊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성용 블랙박스 ‘비콘(Beacon)’을 개발한 ANT61이다. ANT61의 미하일 아사브킨 CEO는 “처음 구상한 아이템은 연료를 재충전하는 로봇이었지만 시장 수요가 크지 않았다”며 “시카다 팀이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 질문에서 비콘이라는 아이디어가 출발했다”고 말했다. 이 제품은 한국에도 판매가 완료돼 한컴인스페이스의 세종5호에도 탑재될 예정이다.


"10년이 걸려도 된다"...입주 제한 없는 기다림

하지만 무엇보다 시카다가 제공하는 가장 큰 지원은 ‘기다림’이다. 시카다에는 입주 기간 제한이 없다. 시안 프리스트 총괄은 “최소 입주 기간도, 퇴거 시한도 없다”며 “기업들은 상업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단계, 즉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고 시장 진입 경로를 확보했을 때 시카다를 떠난다. 2년 만에 나가는 곳도 있지만 길게는 10년이 걸린 사례도 있다”고 설명했다.

컨택타일의 헤바 카미스 CEO가 로봇 손에 촉각을 구현하는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김연주 기자


컨택타일은 2021년 시카다와 함께한 이후 올해로 5년째를 맞았고, 럭스에너지 역시 2022년 입주한 뒤 4년가량 머물고 있다. 럭스에너지의 제핸 캉가 CEO는 이를 두고 “로켓 연료”라고 표현했다.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초기 단계에서도 수년간 실험을 이어가며 버틸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다.

이 같은 시카다의 성공 철학은 최근 국가 차원에서 창업을 장려하며 지원책을 확대하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 역시 초기창업패키지와 창업도약패키지 등 다양한 스타트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다만 대다수 프로그램은 3년 안팎에서 종료된다. 중소기업창업 지원법상 창업보육센터 입주 기간도 입주 개시일부터 6개월 이상 3년 이내로 정해져 있고, 연장이 가능하더라도 심사위원회를 거쳐야 하는 등 조건이 까다롭다.

실제로 산업연구원이 지난달 29일 발간한 ‘한국 벤처생태계 담론 변화와 정책과제’ 보고서도 비슷한 문제를 짚었다. 2015년과 2023년을 비교한 결과, 창업 3년 이하 초기 기업과 21년 이상 장수 기업의 비중은 늘어난 반면 매출 확대와 시장 안착이 이뤄지는 4~20년 차 기업 비중은 지속해서 감소했다. 보고서는 "성장 단계별 정책 지원이 실제 기업의 성장 경로와 충분히 맞물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또 보고서는 정권 교체 때마다 벤처 지원 정책의 방향이 흔들리는 점 역시 주요 과제로 지목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 윤석열 정부의 ‘민간 중심 글로벌 확장’은 큰 흐름에서 보면 기반 구축, 질적 성장, 민간 전환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달라지면서 기업들이 장기적인 성장 경로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로 꼽혔다.


'규제 일관성'이 강점, 호주 수석과학자 제도 운영

실제로 호주에서 창업을 선택한 글로벌 석학들은 호주의 강점으로 ‘규제의 일관성’을 꼽았다.

양자컴퓨터 구동에 필요한 제어 시스템과 극저온 전자장치를 개발하는 이머전스 퀀텀의 공동창업자 겸 CEO 데이비드 라일리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를 거쳐 호주 시드니대로 옮겨 창업했다. 그는 “장기적인 기술 개발에는 정부 정책과 법·제도 환경, 펀딩 체계의 안정성이 중요하다”며 “규제와 정책이 자주 바뀌면 사업은 훨씬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데 호주는 규제와 정책 방향이 수십 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는 점이 큰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규제의 안정성 뒤에는 호주의 ‘수석과학자(Chief Scientist)’ 제도가 자리하고 있다. 수석과학자는 총리에게 직접 과학기술 자문을 제공하며 국가 연구개발 전략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1989년 노동당 정부가 처음 도입한 이 제도는 지금까지 10명의 수석과학자를 거쳤다. 보수와 진보 정권이 번갈아들어서는 동안에도 수석과학자들은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임기를 수행해 왔고, 이는 호주가 일관된 과학기술 정책을 유지해온 배경으로 평가받는다.

※이 기사는 한국여성기자협회 주관 '딥테크 관련 호주 R&D 및 정책' 현장취재를 통해 보도되었습니다.

캔버라·시드니=김연주 기자 kim.yeon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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