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0세기 군벌에 빠진 이유 [왕겅우 회고록-청년기(9)]
IX
Why 10th Century / 왜 10세기인가?
소아스에 지원할 때 나는 남중국해 중국인의 활동에 관한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남해 교역을 다룬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을 무렵에 우리 지리학과의 역사지리학자 폴 휘트먼이 송대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교역 품목 연구를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방대한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에 나오는 교역 품목 목록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뒤의 시기, 원나라의 대륙 석권 후 해상교역이 뚜렷한 발전을 이룬 시기를 바라볼 생각을 했다. 명나라 초 영락제 아래 정화 함대가 일곱 차례 인도양 원정에 나서고 말라카제국을 일으켜주었다. 그 원정을 계기로 지역의 모든 해안 왕국들이 중국과 새로운 차원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나는 소아스 역사학과에 등록했는데, 학과장 사이릴 필립스 교수는 동인도회사 연구로 알려진 분이었다. 말라야 출신인 나는 동남아시아사 담당 D.G.E. 홀 교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홀 교수는 중국 자료에 관한 도움이 필요할 때는 교내의 다른 전문가를 찾으면 된다고 했다. 도서관에는 중국 서적과 연구잡지들이 잘 갖춰져 있었고, 중국학과장은 유명한 중국-티베트 문헌학자 월터 사이먼, 유럽 중국학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런던에서 처음 사귄 친구의 하나가 제롬 첸(陳志讓), 군벌시대를 연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지금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20세기 중국, 특히 민국 초기의 군벌 할거 시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민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중국이 거듭거듭 통일을 향해 움직인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아무리 독재적이고 잔인한 사람이라도 중국을 재통일한 사람은 무조건 위대한 인물로 떠받드는 이유 또한 궁금했다. 쑨원에게서 민국을 빼앗고 시간을 거슬러 군주제로 돌아가려 한 인물을 주제로 잡은 제롬의 용기가 부러웠다.
그 무렵에는 왕조시대 중국사 연구를 계속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내가 막 쓴 논문은 960년까지 다루는데, 중국의 분열이 가장 심했던 시기인 오대십국(五代十国, 907–960)이 끝나는 시점이다. 부분적 재통일 코앞에서 작업이 끝난 것이다. 870-970년 기간 중국사의 심한 분열에는 20세기 초의 분열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군벌 할거 생각을 떠올리면서 남해 교역 같은 변두리 주제 대신 중국사의 더 중심적인 주제로 바꿀 기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내 마음속의 의문은 〈삼국연의(三國演義)〉의 널리 알려진 첫 구절 “나뉜 지 오래되면 합쳐지고, 합친 지 오래되면 나눠진다.(分久必合,合久必分)”로 요약된다. 재통일 과업에 가까이 간 것이 진(晉)나라였으나 그 부분적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3백 년간 투쟁이 계속되었고, 통일제국의 이념을 내건 경우도 종종 있었다. 589년에 수나라가, 그리고 618년에 당나라가 그 이념을 실현했을 때는 재통일을 신성한 과업으로 여기는 관념이 사람들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중국 정치문화의 중요한 전통인 만큼, 10세기 “군벌”들의 소망을 연구하는 것이 중국사의 핵심부에 접근하는 좋은 길이 될 것 같았다.
이 주제에 매력을 느낀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내 공부는 중국과 그 남쪽 이웃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 결과 북중국 상황에 내가 어둡다는 느낌이 있었다. 둘째로, 북중국과 남중국 사이의 대결에서는 1949년의 공산당 승리에 이르기까지 북방이 늘 승리를 거두었다. 왜일까?
분열은 나쁜 것이고 통일이 이루고 지켜야 할 이상적 상태라는 관념이 그 시기부터 중국인들에게 주입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20세기 군벌을 연구할 수 없다면 10세기 군벌이라도 연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각자의 군대를 가지고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서로 항쟁을 벌인 절도사들이 당 제국을 쪼개 나간 과정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당시 런던에는 이 주제를 잘 알기는커녕 관심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오대(五代)”는 서양 연구에서 완전히 무시된 영역이었다. 단 하나 볼프람 에버하르트의 〈정복자와 통치자Conquerors and Rulers〉(1952)가 있었다. 재미있는 책이기는 하나 내가 관심을 가진 재통일 문제보다 돌궐계 사타(沙陀)족에게만 쏠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중요한 주제 하나가 소홀한 채로 남겨져 있었고, 나는 그 주제에 빨려들었다.
Meeting Sinology Halfway / 중국학과의 절충
명나라와 동남아시아의 관계라는 애초의 주제를 접어놓는다면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데 소아스에서 첫 몇 달을 썼다. 만약 근대 이전의 중국에 관한 작업을 계속한다면 유럽에서 그 방면 연구를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중국학 연구자들이었다.
그 차이를 싱가포르에서 폴 펠리오의 업적을 살펴보며 알게 되었다. 첸무(錢穆)나 첸인커(陳寅恪) 같은 중국 학자들은 중국의 고전 문헌학에 통달한 역사학자들이었다. 중국사를 전공하는 일본 학자들 역시 고전 문헌학에 조예가 깊었다. 에버하르트의 책을 읽으며 중국학 연구자가 앙카라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버클리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유명한 민속학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가 중국학 연구자로 인정받는 경우는 알지 못했다.
다행히 결정적 시점에 내 터무니없는 과제를 도와줄 두 분 학자가 영국에 있었다. 에드윈 펄리블랭크와 데니스 트위체트는 둘 다 전쟁 중 일본 라디오 통신을 듣는 암호해독 작업을 통해 일본어를 익히고 종전 후 중국 고전과 중국학 공부에 나섰다. 펄리블랭크는 내가 런던에 도착할 무렵에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데니스가 소아스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본에서 막 돌아온 그에게 나를 도와주도록 홀 교수가 부탁했다. 그는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 가토 시게시(加藤繁)와 유도 요시유키(周道吉之) 등 참신한 시각으로 당송 시대사를 세운 학자들의 연구를 읽어보도록 권했다. 그들의 “현대일본판 중국학”은 전통적 중국 학술에 뿌리를 두면서 유럽 동방학의 최고의 성과를 아우른 것이었다. 많은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활용하면서 중요한 중국 자료들도 자신감을 갖고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중국학의 적절한 요소들을 잘 활용하면 내가 역사학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또 하나 행운은 1956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청년 중국학자 대회에 초청받은 일이다. 연구업적을 더러 읽어보기도 한 많은 유럽 “중국학자”를 만날 기회였다. 이 대회에서 특기할 일은 중국 당국이 네 명 역사학자를 보낸 것이다. 인솔자는 북경대학 사학과장 겸 부총장 젠보잔(翦伯赞), 중국의 공식적 역사관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몇몇 유럽 학자들이 그의 마르크스주의 고대사 해석을 비판하며 중국의 “노예”사회와 “봉건”사회를 하-상-주(夏商周) 삼대로 정형화하는 관점에 불신을 토로하는 장면에 나는 흠뻑 빠져들었다.
런던에서 이집트학을 공부하고 중국의 고고학을 대표하는 위치에 선 샤나이(夏鼐)도 왔다. 북중국 지역의 최근 발굴 성과에 관한 그의 발표에 모두 주의를 기울였다. 그 밖의 두 사람은 저우이량(周一良)과 장즈롄(張芝聯)이었다.
중국에서 온 학자들에게 이 대회가 얼마나 특별한 일이었을지 나중에 깨달았다. 네 사람이 파리에 온 것은 마오쩌둥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연설 직전이었다. 불과 몇 달 후 “반-우파” 운동이 시작되어 정통 레닌주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학자들은 일체 글쓰기를 중단해야 했고, 탄압이나 처벌을 면하면 다행인 세상이 되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중요한 연구 중심지에서 온 중국학 연구자들이 있어서 중국학의 오랜 전통을 보여주었다. 미국에서 온 한 학자와 대화를 나눈 것이 하버드의 벤저민 슈워츠였다. 그런 사람도 중국학자였다니. 그 대회에 그가 있는 것을 보며 중국학에도 여러 길이 있고, 내 불안한 위치에도 희망이 없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중국계 대학원생으로 유일한 참석자라는 데 고마움을 느끼며 수준 높은 토론 앞에 내 부족함도 느끼고 영감도 얻었다. 또한 하고자 하는 작업에 내 준비가 얼마나 부족한지 절감하면서 학자로서 어떤 길이 내게 적합할지 궁리하던 생각이 난다. 훌륭한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한 자리였고,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 되었다.
홀 교수는 내가 동남아시아를 떠나 중국사 연구로 옮기는 것을 아쉬워했으나 지도교수를 계속 맡아주었다. 나를 도와주도록 부탁받은 데니스는 강사로 새로 와 자기 학위논문을 마무리하는 참이라서 공식 지도교수를 맡을 자격이 안 되었다. 그래도 데니스는 나를 잘 돌봐주고, 최고의 조언으로 내가 제대로 된 중국학 훈련 없이 중국사 논문을 쓸 길을 알려주었다.
학과장 사이릴 필립스 교수는 내가 역사학도의 길을 지키기 바랐다. 그는 남아시아사 교수였는데, 파킨슨 교수의 업적을 알고 있었고, 내가 초기 중국사를 계속하더라도 현대 역사학 방법을 지키도록 격려해주었다. 중세사를 더 많이 읽도록 권해준 이유를 당시에는 몰랐는데, 논문 제출 때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역사학도로서 중국학 학위를 받을 수 없는데, 10세기 중국을 다뤘기 때문에 중세사로 학위를 받게 된 것이다.
EngLit England / 영국의 문화에 빠져
런던의 첫해를 지내면서 문학의 관심이 내게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런던의 길거리가 놀랍도록 낯익었다. 대학 문화관 바로 밑에 있는 숙소에서 걸어 다닐 거리 내에 블룸스베리와 대영박물관, 소호와 피카딜리 광장, 그리고 토트넘코트 가의 중고서점들이 있었다. 영국문화원은 각지에서 온 학자들이 문학과 음악의 관심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온갖 배려를 베풀었다.
새로 연 로열 페스티벌 홀이 너무 좋아서 그곳 공연에는 모두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몇 개 음악회에서는 값이 싼 꼭대기 층에 끼어들 형편이 되었다. 제일 신났던 일은 윌리엄 월튼의 오페라 〈Troilus and Cressida〉 전야제 입장권을 문화원에서 받은 것이었다. 진짜 오페라 관람은 처음이었고, 솔직히 많이 즐기지 못했다. 좋은 작품들을 거듭거듭 보면서 오페라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교향악을 더 좋아하는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다른 행운도 있었다. 소아스 바로 옆의 코노트 홀 숙소에서 대영박물관을 자주 가볼 수 있었다. 그곳에 전시된 수많은 다양한 유물을 통해 영국이 교역하고 지배를 꾀한 많은 지역을 향한 제국의 관점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과거에 대한 영국인의 자부심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전 세계에 미친 그들의 힘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본업 문제보다 이런 과외활동에 더 빠져 있는 모습을 마거릿도 눈치채고 내 결정이 늦어지는 원인을 의심했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말하는 “중세사”는 나랑 아무 상관 없던 분야인데, 유럽인이 “중국학”이라 부르는 분야와 중세사 사이에 내가 끼어 있는 상황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마거릿이 알았다면 걱정했을 것이다.
중국학 분야에서 아서 웨일리가 정식 훈련 없이 대표적 존재가 된 사실이 흥미로웠다. 나 역시 “한학(漢學)” 훈련 없이 역사학에 공헌하는 길이 있을 것 같았다. 내 스승 데니스는 그런 희망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주었다. 1961년 소아스 중국학 교수 취임 연설에서 웨일리가 중국학에 자신의 새 영역을 일궈냈다고 평가하는 대목에서 그렇게 느꼈다. 그 후 내 학문 경력이 펼쳐지는 과정을 꾸준히 지지해 준 이유도 같은 데 있었던 것 아닐까?
다른 종류 런던의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대영박물관 다니는 길에 부근 서점들도 알게 되었는데, 그중의 공산주의 출판사 로렌스 앤 위샤트에서는 최근의 중국(PRC) 정기간행물을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낸 첫 영문판 〈마오쩌둥선집〉이 소아스의 아프리카-아시아 학생들에게 화제의 책이었다.
중국에서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가치를 뒤집어엎는 작업이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말라야의 정치적 변화에 더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곳 공산주의자들이 갈수록 정글 깊이 쫓겨 들어가고 있어서 반란의 실패가 확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는 식민 권력에 대한 시민 저항이 커지고 있고 가두에서 조합운동가와 학생들의 활동이 맹렬해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리콴유가 이끄는 조그만 인민행동당(PAP)이 좌익 조합들의 지지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회주의클럽을 함께 하던 대학 친구들이 PAP를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는 소식이 특히 흥미로웠다.
나는 마거릿에게 문학 명소들 방문한 이야기를 알려주며 중요한 몇 곳은 나중에 함께 다니도록 아껴둔다고 약속했다. 마거릿은 성 앤드류 중학의 6학년 영어교사 노릇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려주었다. 노동조합과 일부 중국인학교의 불안한 상황 이야기도 곁들여주었다.
내가 연구 주제를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에서 오대(五代) 연구로 바꾼 것을 마거릿이 마침내 알게 되자 얼마나 걱정이 되었는지 내가 제정신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설명하자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다짐해 주었다. 내가 내 정신이라는 내 주장에 대한 마거릿의 믿음은 살아오는 동안 거듭거듭 시련을 겪었으나 결혼 후 12년 동안 일곱 차례 이사하면서 그 믿음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다행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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