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 따라 산 호피무늬 안경, 그 너머로 본 것

문현호 2026. 4. 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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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생이 무한한 음으로 남기까지...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관람기

[문현호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이 마르지 않는 샘이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얼마나 더 많은 보름달을 마주할 수 있을지, 빛나던 어느 오후를 얼마나 더 선명하게 기억하며 살 수 있을지 계산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는 바로 그 지점, 인생의 샘이 마르기 시작했다는 엄중한 사실을 인지한 한 인간의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숭고한 기록입니다.
 거장의 마지막 일기를 마주하기 전,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개봉 소식이 걸린 광화문 씨네큐브 전경
ⓒ 문현호
지난주 서울 광화문 회사 옆 '씨네큐브'에 이 영화의 개봉 포스터를 마주한 뒤로 줄곧 관람만을 기다렸습니다. 바쁜 업무 탓으로 개봉일 당일 관람은 놓치고 말았지만, 그 아쉬움만큼 그의 오래된 팬으로서의 갈증은 더 깊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물론, 삶을 대하는 태도와 사유를 오랜 시간 흠모 해온 팬으로서 이번 영화는 저에게 피할 수 없는 초대장이었습니다. 그의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한 내면을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 3년 전 맞췄던 호피 무늬 뿔테 안경을 고쳐 쓰고 자리에 앉으니, 안경 너머로 비친 스크린 속 사카모토와 눈을 맞추는 듯한 전율이 흘렀습니다.

이 영화는 '코다(2017)', '에이싱크(2018)', '오퍼스(2024)'에 이은 그의 네 번째 자전적 영화입니다. 앞선 두 편이 암 투병을 딛고 활동을 재개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면, 사후에 공개된 '오퍼스'와 '다이어리'는 그가 두 번째 암을 받아들이고 인생을 갈무리하는 과정을 담은 유고작의 성격을 띱니다.

이 네 편의 영화를 순서대로 따라가는 일은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투병을 딛고 일어선 재기의 기록(코다)부터, 그 결실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인 순간(에이싱크), 그리고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혼신을 다한 연주(오퍼스)까지. '다이어리'는 그 기나긴 여정의 끝, 생의 마지막 절벽 앞에서 그가 음악으로 어떻게 숨을 쉬었는지 보여주는 최종장입니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 다이어리>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마당의 피아노, 엔트로피와 자연으로의 회귀

영화의 도입부, 뉴욕 자택 마당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은유입니다. 사카모토는 피아노를 비바람이 치는 마당에 일부러 방치합니다. 조율이 어긋나고, 도장이 벗겨지며, 견고했던 나무가 서서히 삭아가는 과정을 관찰하며 그는 이를 피아노를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실험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억지로 누르고 깎아 만든 악기라는 형태를 벗어던지고, 원래의 물질인 나무와 쇠로 돌아가는 과정. 이는 암세포에 침식 당하며 서서히 우주의 일부로 회귀하는 사카모토 자신의 육체와 서글프게 겹칩니다. 그에게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율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우주의 본연적인 진동으로 돌아가는 장엄한 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죽음 앞에서도 우아하고 초연하게 떠났을 것이라 짐작하곤 합니다. 그러나 다이어리 속 그의 기록은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흔들렸는지 가감 없이 증언합니다.

2020년 12월 11일 : 진짜일까. 현실감이 없다. 치료 없이 6개월을 살까, 부작용을 견디며 5년을 살까.

2020년 12월 13일 : 손쓰기엔 늦었다고 한다. 내 인생은 끝났다.

야수처럼 건강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자책하고, 산다는 건 귀찮다고 체념 하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자며 의지를 다지는 모습은 그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 절망의 심연을 보았기에, 그가 남긴 마지막 음들이 더욱 숭고하게 다가옵니다. 그는 안락사를 고민할 만큼 깊은 고통 속에서도 결국 음악을 만드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마지막 구원으로 선택했습니다.
사회적 실천, 고통을 지휘하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 다이어리> 스틸컷
ⓒ 영화사 진진
말년의 사카모토는 더 이상 정교한 선율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병상 곁에는 항상 소리가 나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에게 구원은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아니라 창밖을 때리는 무질서한 빗소리였고, 소리 없이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40대부터 자신의 음악적 종착지를 자연으로 설정했습니다. 서양 음악의 12음계라는 틀이 자연의 소리를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던 것일까요. 그는 쓰나미에 휩쓸려 조율이 나간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자연이 조율해 준 아름다운 상태라고 말합니다. 영화는 그가 인간의 언어와 음계를 하나씩 지워내고, 온 우주에 가득 찬 본연의 울림을 붙잡으려 애쓰는 과정을 스크린 속에 담담히 담아냅니다.

육신이 너덜너덜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사카모토는 시선을 외부로 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 아이들로 구성된 토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향한 애정은 각별했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음악이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삶을 버티게 하는 존엄한 힘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비극 속에서 우크라이나 음악가 일리야를 위해 곡을 쓰는 등,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가가 사회적 비극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병상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을 보며 허공에 손을 휘젓는 장면은, 그의 영혼이 이미 육신을 넘어 타인의 고통과 희망에 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절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마지막 일기, 숫자로 기록된 생의 존엄

2023년 3월 26일, 그가 남긴 마지막 일기는 시도, 음악적 메모도 아니었습니다.

'0545 36.7/ BP 115-80/SPO 97'

시간, 체온, 혈압, 산소포화도.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건조하고도 정직한 수치들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있음을 그 숫자들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인 3월 28일, 그는 영원한 침묵 속으로 떠났습니다.

타계 1시간 전까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손가락을 까딱이며 피아노를 치듯 움직였다는 기록은, 그에게 음악은 직업이나 예술을 넘어선 호흡 그 자체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만의 보이지 않는 건반 위에서 생의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경계를 지우는 사유, 그리고 보름달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스틸
ⓒ (주)영화사진진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보름달 사진들은 그가 지난 3년 6개월간 직접 찍은 기록들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찍은 이 달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의 밤을 비출 것임을 말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생이라는 샘이 마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기록하겠습니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지만, 그 짧은 인생을 예술처럼 살아낸 그의 기록은 우리에게 근사하게 나이 들고, 정직하게 떠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씨네큐브를 나설 때, 그를 따라 산 호피무늬 안경 너머로 마주한 광화문의 밤하늘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그의 음악은 이제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듣는 모든 빗소리와 바람 소리 속에 영원히 깃들어 우리를 위로할 것입니다.

Ars longa, vita brevis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의 묘비명처럼 남은 이 문구가 이제 우리 각자의 다이어리 첫 페이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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