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도 말라"는 여왕의 명령, 자고 깨니 남자에서 여자로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6세기 말 영국,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초석을 다진 엘리자베스 1세 통치가 저물던 시절이다.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미모의 소유자이자 대귀족 가문 후계자인 귀공자 '올란도'는 여왕의 눈에 들어 총애받는다. 여왕은 총신에게 특전을 하사하되, '영원히 늙지도, 시들지도 말라'는 조건을 붙인다.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 앤 여왕,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를 지나며 400년 동안 올란도는 죽음과 사랑, 시와 정치, 사회에 관해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그는 몇 명 몫을 합친 듯 긴 삶에서 종종 며칠씩 잠에 빠지고 깨어나길 반복한다. 그때마다 불가사의한 변화를 겪는다. 남자와 여자를 오가며 겪던 혼란을 딛고 마침내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한 인간이 된 올란도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쓰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그/그녀의 장구한 인생에 대한 회고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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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란도> 스틸 |
| ⓒ 찬란 |
<델라웨어 부인>과 <자기만의 방>으로 20세기 초, 영국 문단을 놀라게 한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공개된 소설을 통해 자전적인 경험담을 반영한 놀라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녀가 실제 연인 관계였던 비타 색빌 웨스트를 모델로 삼은 주인공 올란도의 신비한 생애는 당대는 물론 21세기 현재 시선으로 봐도 경이롭다. 어떻게 이런 상상력을 품을 수 있을까? 대체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길래 원작을 집필할 수 있었을까?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그녀가 살던 시대를 더불어 이해해야 접근할 수 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가진 아름다운 피조물 올란도지만, 그는 백지상태에 가까운 존재다. 인생의 흥망성쇠를 고루 경험한 위대한 여왕은 총애하는 신하가 자신은 갖지 못한 삶의 희로애락을 맛보길 기대하며 얼핏 저주와 같은 축복을 내린다. 그 명령은 400년을 경유하는 동안 한 치도 흔들리지 않고 관철된다. 거저 주어진 은총의 주인공은 삶을 누리지만, 아직은 온전히 그 혜택을 소화하지 못한 채 혼돈에 휩싸인다.
물려받은 지위와 부, 무한정 길어진 수명 덕에 평범한 타인이라면 아등바등 쫓기듯 살 때 그는 여전히 출구가 보이지 않는 방황에 빠진 상태다.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건만 상대에게 배신당한 상처로 올란도는 무작정 세상의 끄트머리로 숨기라도 하려는 듯 멀리 떨어진 동방에 대사로 부임한다. 스스로 유배되려 했지만, 낯선 이국에서의 삶과 만남은 올란도에게 깊숙한 흔적을 남긴다. 한때 경멸하던 여성성에 눈을 뜨며 아침에 깨어나니 여자의 몸으로 변한 상태다. 그녀는 자신의 변화를 너무나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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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란도> 스틸 |
| ⓒ 찬란 |
당대 남성에게 덕목으로 받아들여지던 입신출세와 사회적 성취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올란도지만, 내면의 갈증은 도무지 해소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자 하지만, 자신이 재능을 인정하며 초청한 당대 저명한 시인에게 결핍이란 모르는 철부지 한량 취급을 받는다. 외교와 정치, 당대 신사와 귀족들이 '남자'다운 일이라 여기던 분야에 도전하지만, 도무지 공무에 두각을 드러낼 방도가 없다. 늘 부유하며 찾을 수 없는 갈망에 시달린다. 마치 벰파이어처럼.
성별이 어느 날 아침 문득 바뀐다. 그러나 통속적인 성별 전환 코미디와는 다르게 올란도는 이미 예감했다는 듯 담담히 나는 나라고 읊조린다. 별일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수용하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였던 영국에서 그녀는 가문의 상속에서 배제를 당하고 기나긴 소송이 시작된다. 올란도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출발점에 들어설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물려받은 유산과 지위에 얽매인다. 스스로 고민해도 쉽사리 포기하기 힘들다. 자신에게서 그 물질적, 역사적 배경을 떼어버리면 뭐가 남을까 두려운 것. 누구라도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주인공이 불가사의한 잠에 빠졌다가 깨어날 때마다 시대가 바뀐다. 복색과 의상이 바뀌고, 기차와 비행기가 깜짝 놀라게 만든다. '세계'의 경계는 끝없이 확대된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지만, 올란도 자신이 변함이 없다면, 공백은 천천히 채우면 된다. 그렇게 얼떨떨하면서도 장구한 인생에 이제 일정하게 적응한 그녀는 새롭게 닥칠 파도를 수용할 태세를 갖춘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이 깃든다. 400년의 시험을 통과해 드디어 자신의 특별한 삶을 온전하게 제 것으로 삼고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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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란도> 스틸 |
| ⓒ 찬란 |
여기에 이야기의 밀도를 확보하고자 소설에서는 좀 더 복잡한 여타 등장인물을 간략화한 감이 있다. 올란도의 삶에서 몇 번에 걸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또 다른 존재와의 인연을 강조한 게 1928년 소설이라면, 1992년 영화는 가족에 속박되지 않는 주인공의 운명을 부각하는 차이점이 확연하다. 마치 윤회하듯 세상과 조응하며 끝없이 변주되는 올란도의 종착역을 바뀐 시대 정서에 맞춰 적절하게 조정한 걸로 이해하면 될 테다.
영국 사회의 변화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측면에서 원작에 없던 2차 대전 당시 영국이 겪은 런던 대공습 묘사가 등장한다. 이는 원작의 확장 해석에 가깝다. 버지니아 울프는 생애 말년에 폭격을 당해 자택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작가의 죽음에 해당 사건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고려하면 올란도의 진정한 재탄생을 위한 통과의례이자 마지막 시험으로 왜 굳이 새로운 설정을 추가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의 몸으로 변화한 뒤, 주인공이 세기에 걸쳐 진행하는 재산 소송 역시 단순하게 올란도가 가문의 부를 아까워한 집착 때문만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상징하는 대표 저작, <자기만의 방>에서 역설하던 요소, 여성의 자립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여건을 은유하는 것으로 보면 타당한 대목이다. 작가 역시 명성에도 불구하고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겪다 유산 상속으로 비로소 집필에 전념할 수 있던 경험이 자연스레 반영된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주인공이 자기 생애를 소설로 탈고한 다음, 자신을 면박하던 시인의 먼 후예와 원고료 교섭을 벌이는 장면은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이 겹쳐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상징적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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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올란도> 스틸 |
| ⓒ 찬란 |
우리에겐 <타이타닉>의 밉상 약혼자로 각인되어 있지만, 올란도의 운명적 상대이자, 시대의 통념을 초월한 이상적 연인으로 등장하는 '셰머딘' 역의 배우 빌리 제인도 반가운 얼굴이다. 원작과 비교해 축소되긴 했지만, 주인공의 장구한 삶에 거듭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일인다역 연기를 포착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 한 세기 구간마다 절묘하게 교체되는 의상과 문화, 올란도가 거듭 돌아오는 저택의 변천사도 또 다른 캐릭터로 관객의 시선을 홀리듯 사로잡는다.
1994년 국내 첫 개봉 후 전설의 작업처럼 오랜 세월 기억 속에 간직된 <올란도>가 30여 년 만에 극장에 귀환하는 즈음, 반가움과 함께 어쩌면 추억 보정으로 그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도 나올 테다. 하지만 한 세대를 넘어 다시 만나더라도 작중 주인공처럼 조금도 녹슬거나 쇠락한 기미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반지의 제왕' 속 엘프처럼 젊음과 현명함이 더 잘 어우러진 느낌이다. 두려움 없이 기꺼이, 그리고 반가이 맞이하면 될 재회의 순간이다.
<작품정보>
올란도
Orlando
1992|영국|로맨스, 멜로, 드라마, 판타지
2026.04.08. (재)개봉|94분|15세 관람가
감독 샐리 포터
출연 틸다 스윈튼, 빌리 제인
원작 버지니아 울프 - 소설 《올랜도》
수입 찬란
배급 에이유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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