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불을 싸지르고' 싶다, 새로 사랑하고 싶다
[안준철 기자]
|
|
| ▲ 장진희 시인의 첫 시집 <불을 놓아>(솔, 2026년) 표지 |
| ⓒ 안준철 |
긴 겨울을 나는 산골
아이도 젊은이도 없는 마을
영감도 먼저 가버린
기름값 무서워 더욱 썰렁한 집을 나와
할매들 마을회관에 오골오골 모여 있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미역 다시마 싣고
방방곡곡 산골짝 마을마다 찾아가는
나는야 미역장시
작년에 왔던 각설이, 아니 미역장시,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할매들 반겼다
- <유랑장사> 부분
장진희 시인은 스스로를 '미역장시'라 부른다. '미역장수'도 아니고 '미역장시'다. 남이 부르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장돌뱅이'라는 호칭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니 어쩌랴. "한국 시단이 처음 경험하는 '여성 장돌뱅이 시인'의 첫 시집"이라는 출판사의 시집 소개도 부담이 없다.
장 시인은 진도에서 나서 목포에서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삼십대 후반에 무주로 귀농, 다시 진도의 바닷가에서 살다가 지금은 곡성군 죽곡면 보성강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한 해에 몇 번은 차를 몰고 진도에 간다. 고향 바다에서 미역 다시마를 받아와서 방방곡곡 산골짝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다.
동냥젖 얻어먹듯 할매들 사랑 탁발이었다.
"밥때가 됐는디 밥 묵고 가"라는 마을회관 할매들 사랑에 미역장시도 가만 있을 수 없어서 "내일 점심 때 같이 끓여드시라고/미역 한 가닥 꺾어 내놓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랬는데 돌림병(코로나 19)이 걷잡을 수 없이 돌자 마을회관이 문을 걸어 잠근다. 아무리 인정이 많은 시골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도 어느 마을회관에서는 "장사는 못 해도 항꾼에 밥이나 묵고 가쑈" 하며 미역장시에게 인정을 베푼다. "항꾼에"는 '함께'라는 뜻의 전라도 방언이다.
장 시인은 작년에 6인 공동시집으로 <섬진강 시인들>(엠엔북스)을 냈다. 이번에 출간한 시집 <불을 놓아>(2026년 3월, 솔)는 단독으로는 첫 시집인 셈이다. 장 시인은 인쇄소에서 시집을 가져왔다는 출판사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시집이 나온 것을 알았는데 뒤늦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미 책을 팔고 있더란다. 장 시인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신의 시집을 소개하는 "어마어마한" 문장들이었다. 그 중 하나다.
"한국 문학에 유래가 없는 여성 장돌뱅이 '미역장시 아짐'의 독보적인 첫 시집"
장 시인은 "나는 그냥 시를 썼는데 저 문장들은 어마어마하다. 내가 낯설어진다. 또 신기하다"라고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다. 하지만 시집을 두 번 연거푸 정독한 동료 시인이자 독자인 나로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다.
시집 첫 장을 열자마자 "악아!/단풍이 어째서 저라고도 붉은지 알지야//(…)//인자 겨울을 앞두고 저 나무들이 우리 시상에 불을 때주고 있는구나/지 몸 불 살라서 우리 마음 뎁혀 주고 있구나(「단풍이 어째서 붉은지 알아야」)"라니! 초짜 시인의 언어라고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시집 표지에는 표제작인 <불을 놓아> 일부가 적혀 있다.
겨울 끝자락/마른 바람은 찬데
금빛 햇볕 아까운
등짝은/화아/따뜻하네
강가에 마짝 마른 갈대밭
지난 여름 폭우에 쓸려온 쓰레기들
강가 낮은 나무 가지마다
만국기처럼 걸려 있다
불을 싸지르고 싶어라
오래 고운 사랑조차/똥을 누고
낙엽이 지고/쓰레기를 휘감고
그대/마음에 불을 싸질러버리네
- <불을 놓아> 부분
이 시를 읽으면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오래 고운 사랑"보다도 "똥을 누고"에 더 오래 눈길이 머물렀던 것인데, "강가의 바짝 마른 갈대"라거나 "여름 포구에 쓸려온 쓰레기들"과 같은 예쁜 것과는 다소 거리가 먼 풍경이나 사물들로 인해 시가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달까. 시의 감동이 어디서 오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달까.
이 시는 "낙엽도/검불도/쓰레기조차/화르르 화르르/태워버리세//심지 곧은 나무들 살아남은/검게 순정한 땅 위로/연두빛 싹/올라오거든/그렇게/새로 사랑하세"라고 끝을 맺는다. 나도 불을 싸지르고 싶다. 그리고 새로 사랑하고 싶다.
장진희 시인에게서는 "옥수수쉰내"가 난다. 진짜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런? 다음 시를 읽어보자.
포도나무 사이에서/포도 상자가 나온다/옥수수쉰내와 함께 나온다/사내의 눈동자처럼 까만 포도송이 가득하여/까맣게 탄 얼굴 웃으니/옥수수 같은 이빨 더욱 하얗다/푹푹 찌는 더위/땀은 한 말/등은 이미 다 젖었다//산마을 복숭아밭에서 나오는 사내도//(…)//포도 복숭아 사과도 나락도 참깨도/옥수수쉰내 먹고 자라/씨알 통통하다 - <옥수수쉰내> 부분
"옥수수쉰내"를 '옥수수 쉰내'라고 띄어서 써야 맞을 것도 같은데 '옥수수'와 '쉰내'를 하나의 단어로 붙여서 썼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포도 상자가 나올 때 옥수수쉰내와 함께 나오는 이치와 비슷하지 않을까. 달콤한 포도 냄새만 나는 것은 가짜다.
이 시는 "옥수수쉰내 안 나는 놈/여름을 건너뛴 놈/오곡백과 입에 넣지 못하리"로 갈무리가 된다. 나는 아무래도 "여름을 건너뛴 놈"일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
몇 해 전 일이다. 순천작가회의(한국작가회의 순천지부) 소속 회원으로 한솥밥을 먹어온 장진희 시인과 제주 4·3의 아픈 상흔을 돌아보는 역사 기행(다크 투어)에 동행했었다. 제주 조촌읍 북촌리 너븐숭이로 기억한다. 한 걸음 앞에 가던 장진희 시인이 무언가를 보고 통곡을 하면서 돌아 나왔다.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북촌 너븐숭이/뽑아놓은 무처럼 밭에 널린 주검들
피 흘리며 쓰러진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가
그 애기 울음소리/십리도 못 가서 아이고 아이고
또 십리도 못 가서 아이고 아이고
수만의 통곡 소리/바람에 실려 온 섬을 떠돌고 있었다
- <4·3의 아침> 부분
"뽑아놓은 무처럼 밭에 널린 주검들"처럼 가로 누워 있는 비석들을 본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울음을 멈춘 장 시인과 함께 너븐숭이 4·3 기념관에 들어섰는데 거기서도 오열을 참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었으니 고사리 끊으러 산에 가서도 깊은 바다에 수장된 세월호의 아이들을 떠올렸으리라.
창문을 붙잡은 손가락이 어찌나 꽉 붙어 있는지 뗄 수가 없었다고/아무리 힘을 써도 안 돼서 그랬대/애야 엄마가 기다린다 집에 가자/그러니까 손을 놓더래/그렇게 데리고 나왔대 - <4.16> 부분
나는 오늘도 숲속에서 홀로 삼천배를 하였다/고사리 한 대궁 꺾을 때마다 작은 손이 하나 되살아 나고 - <고사리 삼천배> 부분
토속적 비움과 씻김으로 길어 올린 묵직한 산문의 힘
시집 말미에는 <시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나는 작은 배 같다는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산문에는 최소한의 것만 싣고 생의 바다를 건너는 지혜를 겨울나무에 비유해서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몸이 아플 때나 마음이 아플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먹고 자고 쉼 쉬는 것 말고는 재미난 것, 뜻 있는 것, 귀한 것 다 버리고 맨몸으로 웅크리고 버텨야 살아나곤 했습니다. " - '나는 야 겨울나무' 중에서
'가난이 살려낸 것들'이란 부제가 달린 두 번째 산문에는 "접도 할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접도 할머니가 "마지막 몇 달은 그야말로 벼람박에 똥칠을 하며 떡애기"가 되었다가 어머니의 품인 흙으로 돌아가시자 마음 착한 갈퀴손의 며느리는 "어무니 혼을 씻겨드리겠다"고 씻김굿을 해드리기로 한다. 그때 와서 굿을 해준 당돌 이야기가 이렇게 뒤를 잇는다.
"당골은 절대로 구신을 쫒지 않습니다. (…) 서양 사람들은 구신을 쫒느라고 오만 짓을 다 하던데 그래 가지고는 절대로 구신이 쫒아지지 않습니다. 오갈 데 없는 원혼은 결국 누구한테 또 찾아옵니다. 우리 당골을 구신의 그 설움, 그 한恨을 풀어줍니다. 장구 소리 징 소리 장단 맞춘 당골의 소리는 산 사람 죽은 사람 모두의 마음을 녹이고 넋을 어루만져 줍니다." - '씻김 받고 꽃상여 타고' 중에서
'미역 장시 장진희 시가 바로 당골의 씻김굿이었네!'
두 산문까지 시집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저절로 든 생각이다. 그런 장 시인에게 하늘은 늘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집의 무게를 감안하면 소개하고 싶은 시가 많지만 지면 관계 상 한 편만 더 소개한다. "콩밭의 풀조차 가만가만 매주었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약자를 대하는 장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만져진다.
오늘은 하늘이 참 투명하였습니다
그 파아란 빛깔이 깊고 먼 바다만큼 물러나
깃털구름 뭉개구름 파도처럼 하얗게 어울렸습니다
햇살은 뜨겁게 맑고
바람은 헐렁하였습니다
이산 저산 초록은 선명하고
먼 산조차 뚜렷하여
욕망이 숨을 데가 없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착하고 순하게 살았습니다
허리를 펴려고 하늘을 올려다본 농부는
하늘 참 곱다
콩밭에 풀조차 가만가만 매주었습니다
서산에 해 넘어가고
하늘은 발갛게 기뻐하였습니다
- <하늘> 전문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진솔하게 사과한 노무현 대통령...이재명 대통령에게도 기대합니다
- '구멍 난 도로' 누가 메우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 "서북청년단이 다시 오다니요"... 제주시청 앞에 퍼진 청년의 분노
- [이충재 칼럼] 조국·한동훈, 명분이냐 실리냐
- 언론사 '좌파 낙인' 분류표 공개한 국힘, 내용 보면 기가 찹니다
- 우리 아빠 머리 잘라 줄 이발사님은 어디 없나요?
- 하얀 점퍼 입고 오세훈 마중 나온 국힘 시·구의원들... 당과 거리두기?
- 국교위가 '교과서 한자병기' 논의? 국교위 "논의한 바 없다"
- 박형준 "윤석열 배신한 적 없어", 주진우 "난 친한동훈계 아냐"
- 다시 최고치 찍은 이 대통령 국정지지율... 중도·무당층 상승 돋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