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황금 문명, 몰락은 어떻게 시작됐나

맹경환 2026. 4. 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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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책과 길]
정점의 문명
요한 노르베리 지음, 이재황 옮김
책과함께, 540쪽, 3만3000원
가진 것이 없었던 네덜란드공화국은 개방성과 혁신을 무기로 금융혁명과 대제국을 이뤘다. 18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동인도회사의 조선소(위쪽 그림)와 1602년 동인도회사가 주식과 채권을 거래할 목적으로 설립한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 위키미디어 커먼스


자유주의 경제학과 사상사를 넘나들며 인류 진보의 원동력을 탐구해 온 저자는 현재 세계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권위주의와 대중영합주의가 부활해 이웃한 민주주의 국가를 없애고자 하는 잔혹한 독재자들이 존재하는 시대이며, 진보에 대한 믿음보다 불가피한 쇠퇴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한 시대다.”

저자는 이어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문명을 구가하던 ‘황금시대’가 어떻게 정점에 이르고 쇠락의 길을 걸었는지를 분석한 책을 쓴 동기를 엿볼 수 있는 문장도 덧붙인다.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우는 일은 나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어쩌면 우리 배를 계속 항해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고. 책이 위기의 시대에 대한 경고로 읽힐 수도 있지만 저자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인류 역사의 위대한 문명 가운데 7개의 문명을 골라 ‘황금시대’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직접 민주주의와 철학을 탄생시킨 고대 아테네, 법치주의와 실용적 인프라를 구축했던 로마, 종교적 관용과 학문의 부흥을 이끈 아바스 카리파 제국, 상업과 기술 혁신으로 근대 산업혁명의 문턱까지 갔던 중국의 송나라, 분권화된 권력 속에서 인본주의를 싹틔운 르네상스 이탈리아, 금융 혁명과 해상 무역으로 제국을 건설한 네덜란드공화국, 산업혁명과 자유민주주의로 상징되는 현재의 영미권 등이다.


저자가 주목한 황금시대의 공통점은 ‘개방성과 혁신’이다. 17세기 네덜란드공화국을 예로 들어보자. 네덜란드는 자원도 부족하고 영토도 좁은 ‘늪지대’에 불과했다. 저자는 “네덜란드가 처음부터 가진 것이 없었기에 포용성과 능력주의라는 이상을 극단적으로 추구했다”고 말한다. 네덜란드의 번영은 역설적으로 결핍에서 시작됐다. 부족한 자원을 메우기 위해 그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과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이 가져온 자본과 기술, 그리고 상업적 네트워크는 네덜란드를 유럽의 금융 중심지로 탈바꿈시켰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와 증권거래소가 암스테르담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자유시장과 사유 재산권을 확립한 네덜란드의 모델은 이후 영미권 문명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황금 문명이 쇠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개방성과 혁신이 정통주의와 억압으로 대체될 때였다. 저자는 ‘현상 유지 대여과기(Great Status Quo Filter)’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황금기가 무르익으면 사회 내부에는 기득권층이 형성된다. 이때 기존 제도와 질서를 지키려는 힘이 강해지고 그 결과 새로운 아이디어와 변화가 점점 걸러진다는 것이다. 송나라 이후 중국은 성리학적 교조주의에 빠져 ‘닫힌 사회’로 변했고, 아바스 왕조는 종교적 근본주의로 과학적 탐구를 멈춰 세웠다. 저자는 “정치, 종교, 경제에서 단 하나의 답만 허용되기 시작했을 때 실험과 혁신은 멈췄다”고 말한다.

모든 황금시대가 끝났지만 단 하나 예외가 있다.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혁신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돼 그 혜택을 모두가 누리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금은 ‘도달 가능한 최고의 황금시대’다. 하지만 현재 세계는 쇠퇴의 불길한 징후들이 존재한다. 다행인 것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인류가 축적한 지식에 접근하고 모든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한 국가에 의해 현재의 문명이 좌우될 수 없다는 얘기다. 번영과 쇠퇴의 길 사이에서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책의 서두에 인용된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어의 말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 들어 있다. “과거의 진보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는 사회는 머지않아 미래에 진보할 수 있는 자기네의 능력에 대한 믿음도 잃을 것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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