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티멘탈 밸류' 줄거리, 후기와 '자매애'란?



이 공동의 증인들에 관해 〈센티멘탈 밸류〉에서 트리에가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자매가 나눠 갖는 상징적 역할이다. 유능한 배우이지만 일상에서는 불안으로 가득한 언니 노라와, 아내·어머니로 살아가며 오히려 가족 전체의 기둥이 되는 동생 아그네스는 전통적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맞바꾸어 살고 있다. 무대 위에서만 완성되는 인간인 노라는 조명이 꺼지면 즉시 흔들리고 마는데, 그가 자아의 연약한 민낯을 직시하는 순간 부녀 서사처럼 보였던 〈센티멘탈 밸류〉가 자매라는 거울을 비추는 영화임이 드러난다. 전환점은 영화 후반부, 두 자매가 구스타프의 자전적 시나리오을 함께 읽는 장면에서 도래한다. 노라는 아버지가 유년에 겪은 비극이 곧 노라 자신의 것과 유사함을 발견한다. 혼란 속에서 노라가 고통을 반추하며 아그네스에게 묻는다. “어떻게 된 거야? 넌 멀쩡하게 잘 컸는데, 난 이렇게 망가졌잖아.” 그 물음에 아그네스가 답한다. “우리가 자란 방식에서 딱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어. 난 언니가 있었거든. 언니는 자기가 남을 챙길 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언니는 항상 내 곁에 있어줬어. 엄마가 힘들었을 때 언니가 내 머리를 감겨줬잖아. 학교도 데려다주고. 나는 안전하다고 느꼈어.” 아그네스의 평온은 타고난 기질이나 탁월성 때문이 아니라 노라 자신도 잊은 어느 때 그가 성실히 자신의 자매와 통과해온 시간의 결과였던 것이다. 한편 〈아수라처럼〉의 네 자매는 삶의 방식과 성격이 신랄하리만치 다르다. 고레에다의 군상극은 홀로 삶을 꾸리는 장녀, 평범한 전업주부인 차녀, 깐깐한 원칙주의자인 셋째, 비밀 연애를 시작한 막내 사이를 쏘다니며 아버지의 불륜이라는 하나의 사실 앞에 전혀 다른 윤리적 반응으로 쪼개지는 균열을 관찰한다. 특히 셋째 ‘타키코’는 자기만큼 분노하지 않는 자매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고레에다는 이 분열을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카메라를 식탁 위에 오래 묻어두고 네 자매가 각자의 언어로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어긋나는 장면들을 축적한다. 이 구성은 원작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는 동시에 감독이 매우 의식적으로 목표한 바이기도 하다. 관계에 숨은 함의를 아주 작은 것으로 드러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특유의 앙상블은 표면상의 침묵이나 소요와는 별개로 자매들이 서로를 감지하는 기민한 더듬이를 옮기는 데 안성맞춤인 캔버스다. 두 작품의 결정적 차이는 아버지의 대외적 위상이다. 트리에의 구스타프는 실패한 아버지이되 예술가로서의 매력을 끝내 잃지 않으며, 영화는 그에게 일정한 구원을 허락한다. 삶에는 때로 예술보다 더 어려운 질문들이 난무하지만 트리에의 영화는 예술과 예술가의 자리에 암묵적으로 절대적인 입지를 부여한다. 반면 〈아수라처럼〉의 아버지 ‘코타로’는 훨씬 평범한 배신자다. 고레에다는 바로 그 평범함을 통해 자매들의 도덕적 고뇌를 더욱 실존적으로 만든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과 평범하고 초라한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은 같지 않다. 〈센티멘탈 밸류〉가 예술의 효용을, 〈아수라처럼〉이 평범한 삶의 비애를 향해 잔잔한 파문을 그리며 서로 다른 종장을 맺는 결정적 이유도 아버지의 연원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수렴하는 지점도 있다. 두 작품 속 자매들은 끝내 자신들을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정의되는 존재로 놓아두지 않는다. 이들은 내내 망령처럼 떠도는 아버지의 유산과 씨름하지만 동시에 러닝타임 내내(정신적인 의미에서) 어머니의 집에 머문다. 노라와 아그네스는 어머니가 말년을 홀로 보내다 돌아가신 집으로 돌아오고, 고레에다의 네 자매는 어머니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부엌에 모여든다. 아버지의 사건으로 모여든 자매들의 시간이 쌓일수록 그 구심점에는 오히려 (더 말해질 필요가 있으나 어쩐지 과거에도 지금도 침묵 중인) 어머니의 영혼이 자리하고 있음을 관객은 서서히 알아차리게 된다. 말미에 자매들에게 남아 있는 두 집은 각각 지나치게 낡았거나 팔릴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자매들은 그 안에 남아 서로를 끝까지 목격하기를 선택한다. 증언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writer 김소미(〈씨네21〉 기자)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여의도 금융가를 배경으로 한 JTBC 드라마 〈언더커버 미쓰홍〉은 자매애의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직의 시기를 살 만큼 유능했으나 부당하게 좌천된 금융감독원 엘리트 조사관 ‘홍금보’를 중심으로 이제 막 취업을 한 비혼모 ‘미숙’, 가정폭력 생존자이자 베테랑 사무직인 ‘복희’,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살아왔던 한민증권 회장의 혼외자 ‘노라’는 각기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공통의 억압 아래 하나의 가족이자 팀으로 뭉친다. 금보가 고졸 사원 ‘미쓰홍’으로 위장 취업한 한민증권은 여성의 능력을 지우고 그들을 투명 인간처럼 대하는 멸시의 공간이다. 그러나 공적 공간에서 겪는 차별을 연대의 동력으로 삼고, 아무도 자신들을 주목하지 않는다는 무신경함을 무기로 이용한다. 각자의 비밀과 아픔을 하나씩 공유하면서 그들이 함께 살아가는 ‘서울시 여성 기숙사 301호’는 서로를 돌보는 생존의 터전을 넘어, 거악을 무너뜨리는 공모의 기지로 탈바꿈한다.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고, 그 삶을 위협하는 시스템마저 파괴하는 그들의 연대는 창작물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진취적인 자매애처럼 느껴진다.

〈언더커버 미쓰홍〉이 저항으로서의 자매애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면, 같은 시기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경기는 경쟁이 당연시되는 영역에서 실현되는 자매애를 보여줬다. 보드에 몸을 싣고 가파른 빙벽을 오르내리던 스노보드 국가대표 최가온은 거듭되는 실패와 큰 부상을 견디면서 마침내 마지막 시도에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의 금메달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축하해준 이는 이 종목의 전설이라 불리는 클로이 김이었다. 클로이 김을 우상 삼아 그의 모든 것을 배우고자 했던 최가온과 그런 최가온을 후배이자 동료로 아낌없이 지원하고 응원했던 클로이 김의 관계는 ‘라이벌’이라는 수사로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다. 훈련의 고통, 선수로서 느끼는 고독,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며 거듭하는 성장.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나누며 경쟁하는 이들에겐, 견제와 질투가 너무도 가벼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상화와 고다이라 나오의 관계처럼, 서로의 성취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극제로 나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낡은 신화와 국가 간의 감정을 무력화시키며 자매애가 기존의 편견과 경계를 초월하는 감정임을 알게 한다.

최근 종영한 예능 〈야구여왕〉은 자매애가 팀 스포츠를 통해 어떻게 일상의 감각으로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운드 위에서 투수가 짊어진 고독한 부담감을 함께 나누고, 수비 실책으로 인한 자책을 동료와 함께 극복하는 경험은, ‘여자가 여자를 돕는다’는 추상적 구호를 구체화한다. 방송에서 목격되는 이들의 관계는 누군가를 독점하거나 깊은 사생활을 공유해야만 성립되는 좁은 의미의 우정이 아니다. 야구를 통해 잠시 연결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우리가 마주한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며 여성이 여성을 동료로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정의한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는 대중 미디어는 가장 보수적인 장르다. 시청층을 고르게 확보할수록 기성 사회의 시선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즉,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마저도 ‘남성들이 어떻게 볼 것인지’를 신경 쓰고, 그들의 시선을 작품의 ‘개연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많은 수의 창작물이 바로 그 개연성을 이유로 비전을 확장하지 못하고,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를 즐기거나, 도식적인 ‘여돕여(여자를 돕는 건 여자)’를 그리며 공회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말넘많〉이 보여준 동반자로서의 여성, 〈언더커버 미쓰홍〉의 처절한 공모, 클로이 김과 최가온의 경쟁과 존중, 〈야구여왕〉의 반목과 화합을 통해 자매애가 얼마나 다채로운 얼굴로 탄생하는지 목격했다. 남성 중심의 질서가 요구하는 개연성을 거부하고, 설명되지 않던 여성들의 감정을 새로운 문법으로 써 내려가는 이들의 용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도를 쥐여준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에 우리를 가두려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적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 포섭하자. 미움조차 신뢰의 일부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이 폭넓은 사랑의 감정이 이제껏 누구도 밟지 못한 세계로 우리를 데려다줄 것이다. writer 복길(대중문화 평론가)


“사람이 먼저다” 구호를 들을 때면 생각한다. ‘오오, 언제 들어도 멋진 말! 근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람인 걸까?’ ‘시스터후드’라는 단어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 ‘아아, 시스터후드 좋지! 근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스터지?’ 혈육으로 얽힌 자매? 아님 시스젠더 혹은 비혼 여성? 이런 대화를 나누다 멀어진 얼굴들이 떠오른다. ‘브라더’ 하면 황정민이 떠오르는데 ‘시스터’ 하면 여러 얼굴이 떠오른다. 미운 얼굴, 서운한 얼굴,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대책 없이 그립긴 한 얼굴. 사랑과 신의 같은 것만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얼굴. 결국엔 기운이 쏙 빠진다. 하지만 절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참 좋은 것이다. ‘적폐’를 꿈꾸는 게 아니니까. 솔직히 나같이 맹숭맹숭한 인간한테는 ‘연대’라는 말조차 끈끈하고 부담스럽다. 연대라니, 입장과 주장을 번복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뜻을 함께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나눠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내심 이런 연대를 꿈꿔왔다. 진정성 모를 연대, 액세서리 연대, 전향하게 하는 연대, 회항하게 하는 연대, 윤리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연대, 헤픈 연대. 그런데 아무래도 이런 건 연대로 안 쳐주겠지? 이런 내게 ‘-후드’는 안식처가 돼준다. 연대는 자신 없어도 시스터후드 정도는 가질 수 있을 거라 희망하며. 사랑 고백은 민망해도 걸 크러시라는 말은 편히 하듯이. 하지만 금세 스스로를 비웃게 된다. 그럼, 뭐... 시스터후드는 쉽냐. 이런 고민을 하며 그냥 혼자 있었다. 아무래도 혼자 있는 게 편리해서. 민음사의 인문 잡지 〈한편 19호 : 혼자〉가 출간되자마자 집어 들었다. ‘나는 혼자’라는 고백이 하루는 자조, 그다음 날은 자부가 될 수 있음을 읽었다. ‘혼자’라는 건 연대의 동력, 조건, 원인이기도 하지만 눈부신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 내가 ‘혼자’ 살려면 나를 두고 꺼져줄 타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계속 혼자 ‘살려면’ 숨이 붙어 있는지는 확인해줄 타인이 필요하다. ‘잠도 꿈도 공부길의 한 부분’이라며 “잠자리에 드는 일을, 그 완전한 혼자의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여”기는 철학자가 있는가 하면, 같거나 아예 다른 맥락에서 하미나 작가는 말한다. “여성에게 침대는 정치적 광장만큼이나 정치적 투쟁의 장소”이며 “여성은 매일 밤 연인의 얼굴을 한 괴물과 잠이 든다”라고. 아, 그래서 이 작가가 자신을 갈라 자신을 꺼냈구나, 멋대로 이해했다. 자신을 갈라 자신을 꺼내서 뒤척이는 여자들 곁으로 보내주려고. 아, 그래서 이야기를 계속계속 들려주는 책을 썼구나. 머리맡에 두고 기진맥진 잠들 때까지 읽으라고. 어떤 작가의 책은 읽다 보면, 어른한테 들킬 것을 염려하며 속닥거리던 어린 시절 어느 날 밤이 떠오른다. 햇빛 아래 못 한 말이 달빛 아래서는 어쩜 술술 나오는지. 어둠 속에서 자매에게 들었던 고백과 비밀 이야기가 떠오른다. 솔직히 그 내용이 떠오르진 않는다. 차라리 기억나는 건 “자?”라는 질문에 잠기운이 화들짝 달아났던 순간, “듣고 있어, 계속해.” 상대를 달랬던 순간, 너무너무 중요한 이야기인데 몽롱한 채 들어서 미안했던 마음, 다음 날 아침의 괜한 쑥스러움, 이런 게 떠오른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낸다니, 언뜻 나를 ‘긋는’ 것과 한 끗 차이로 보이는 표현이다. 나는 작가가 스스로를 ‘무엇’으로 가르는지를 유념해 읽었다. 그는 ‘앎’으로 그 자신을 가른 듯했다. 그리고 그 앎의 생산자, 매개자는 마녀와 산파, 자연, 관객 등 온갖 ‘여성’이다. 하미나는 이들을 보고 듣고 복권한다. 이 복권, 이 앎이 다시금 그를 갈라 그를 꺼낸다. 나 또한 쩍, 하고 쪼개졌다, 서브스턴스 패키지 같은 것 없이도. 나는 꺼내어진 나를 누구 곁으로 보낼지 고민 중이다. 박완서 작가의 단편소설선 〈쥬디 할머니〉에는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보다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절실한 화자들이 대거 나온다. 화룡점정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설정 자체가 수화기 너머 형님에게 화자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상황이다. 시작부터 헛웃음이 나온다. “전화 바꿨습니다. 어쩐 일이세요? 형님이 전화를 다 주시구. 거는 건 언제나 제 쪽에서였잖아요. 말도 저만 하고 형님은 듣기만 하셨죠.” 독자를 단번에 청자로 끌어 앉히는 기술에 혀를 내둘렀다. 참척한 화자의 구술이 한참 이어지는데 이보다 이기적인 말하기가 또 없다고 힐난하다 끝에 다다라 이 화자를 받아들이게 됐다. “형님, 뭐라고 말씀 좀 해보세요. 아니, 형님 지금 울고 계신 거 아뉴? 형님, 절더러는 어찌 살라고 세상에, 형님이 우신대요?” 그러니까 이 화자는 어쨌든 아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도, 계속 말하기 위해서라도 청자의 안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듣고 있어?” “자?” 듣는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며 말하는 사람을 볼 때면 시야가 흐릿해진다. 안쓰럽고 고마워서. 딱 그만큼의 온정이야말로 연대할 수도, 혼자일 수도 없는 그녀와 내가 ‘가장 나중 지닌 것’일 테니까. writer 원소윤(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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