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ESS 플랫폼…LS일렉의 신무기?
지난 3월 17일 찾아간 일본 도쿄 빅사이트 ‘스마트 그리드 엑스포 2026’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수백여개 기업 전시장 중 LS일렉트릭 전시장 로고가 돋보인다. 인근에 자리 잡은 중국 전기차 배터리 기업 CATL, BYD 전시장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스마트 그리드 엑스포는 스마트 에너지 분야 세계 최대 규모 전시회다.
LS일렉트릭 전시장에 들어서니 입구 왼쪽에 거대한 모습의 차세대 모듈형 에너지저장장치(ESS) 플랫폼 ‘MSSP(Modular Scalable String Platform)’가 단연 눈길을 끈다. MSSP는 전력변환 핵심 부품인 PEBB(Power Electronic Building Block)를 200㎾ 단위로 모듈화한 ESS 플랫폼이다.
LS일렉트릭의 ESS는 MSSP 방식으로 작은 인버터 여러 대를 사용해 기존의 대형 인버터 한 대를 사용할 때보다 운전 부담을 분산했다. 과부하를 줄이고 설비 고장 리스크를 낮춘 것이 특징.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기존 인버터를 빼고 새 인버터 추가가 가능하다.
LS일렉트릭은 그동안 전력전자 기반 산업용 드라이브(인버터) 분야에서 축적해온 전력변환 기술을 바탕으로 MSSP를 독자 개발했다. LS일렉트릭은 145.8㎡ 규모의 전시장에 데이터센터 전용 배전반 ‘UL891’, 데이터센터용 직류(DC) 전력기기 ‘ADB’ ‘MCCB’, 데이터센터 인프라 관리 플랫폼 ‘Beyond X CUB’도 함께 선보였다. CATL, BYD 등 경쟁사들이 내놓은 대용량 ESS와 비교해 기술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다.
박태근 LS일렉트릭 일본사업부장은 “MSSP는 각 모듈이 독립적으로 운전할 수 있도록 설계돼 시스템 확장성, 안정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라며, “PMS(Power Management System)를 내장해 사전에 고장을 예방하고, 발 빠른 사고 대응으로 운영 편의성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신재생에너지 수요 늘어 ESS 급성장
LS일렉트릭이 한국 기업 중 유일하게 스마트 그리드 엑스포 2026에 참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세계 4대 ESS 시장으로 불리는 일본 ESS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다.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계통 연계(서로 다른 전력 계통을 연계하는 것) 수요가 늘며 일본 ESS 시장은 급성장해왔다. 2020년까지만 해도 100억엔(약 930억원) 규모에 불과했지만 올해 1000억엔(약 9300억원) 규모로 10배가량 커질 전망이다. 2030년 시장 규모가 4000억엔(약 3조8000억원)에 달할 것이란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이를 눈여겨본 LS일렉트릭은 일찌감치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일본은 그동안 미쓰비시, 산요 등 현지 기업들이 태양광 발전 시장을 장악해온 데다 까다로운 품질 규제로 해외 기업 진입장벽이 높았다. 하지만 LS일렉트릭은 세계적으로 인증 절차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JET 인증을 획득한 후 태양광 모듈 품질을 인정받아 일본 시장 공략에 나섰다. JET는 일본에서 태양광 사업을 하기 위해 기업들이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일본전기안전환경연구소 인증이다.
이후 점차 수주 성과를 내는 중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2017년 홋카이도에 ‘치토세 태양광 발전소’를 세웠다. 이 발전소는 LS일렉트릭이 한국전력과 공동으로 2017년 6월 완공한 일본 홋카이도 최대 규모 태양광 발전소다. 한전이 자금 조달, 발주 등 프로젝트 전반을 주도하고, LS일렉트릭은 설계·조달·시공(EPC)과 함께 향후 20년간 운영·유지(O&M·Operation & Maintenance)를 맡는 구조다.
LS일렉트릭은 신치토세 국제공항 인근 108만㎡ 부지에 13만여장의 태양광 모듈과 13.7㎿h급 ESS를 구축했다. 한전이 연간 약 1만여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28㎿ 전력을 판매해 수익을 얻는 구조다. 무엇보다 일본 최초 태양광-ESS 연계 태양광 발전소로 눈길을 끈다. 태양광으로 생산된 전기를 ESS에 저장했다 전력이 부족할 때 송전하는 설비다. 날씨에 따라 영향을 받는 일반 태양광 발전에 비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를 필두로 수주를 늘려왔다.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시로이시구 ‘계통 연계 ESS’ EPC 사업은 전력 시장 거래를 목적으로 한 일본 최초의 계통용 ESS 사업으로 눈길을 끈다. 2022년 12월 착공해 2023년 7월부터 상업 가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전력변환 장치(PCS) 3개를 설치해 2㎿의 전력(배터리 용량 약 8㎿h)을 저장, 수시로 일본 전력 업체 홋카이도전력에 공급한다. 일본은 계통용 ESS를 발전소 중 하나로 공식 인정했다.
LS일렉트릭은 2022년에는 일본 경제산업성(METI) 보조금 사업을, 2023년에는 도쿄도 ESS 보조금 사업을 최초로 수주했다. 2024년엔 도쿄도 보조금 연계 ESS 사업을 절반 가량 수주하며 경쟁사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지난해 일본 ESS 사업 수주 규모는 700억원에 달한다.

탄소중립 목표 위해 GX 전략 추진
LS일렉트릭이 일본 시장을 공략하는 것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 에너지 시장이 급변한 덕분이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수요가 늘고,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하자 일본 정부는 대대적인 전력 인프라 투자에 나섰다. 2050년 탄소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녹색 전환(GX, Green Transformation)’ 전략을 추진 중이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전력망 안정화, 전력 인프라 고도화를 핵심 정책으로 앞세웠다. 일본 경제산업성(METI)은 ‘광역 전력망 장기 마스터플랜(Wide-Area Grid Long-Term Policy)’을 수립하고 송·변전망 확충을 추진 중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일본은 2050년까지 약 6조~7조9000억엔 규모의 송전망 투자에 나설 계획이다.
특히 재생에너지 발전이 집중된 곳에서 전력 수요가 많은 대도시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장거리 송전망 구축이 핵심 과제다. 일본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공급하려 대형 송전망 증설과 계통 연계 사업을 진행 중이다.
전력 수요도 연일 증가세다. 일본 에너지경제연구소(IEEJ)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증설로 2030년대 초까지 약 5GW 이상의 신규 전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생성형 AI 열풍으로 데이터센터 산업도 급성장하는 추세다. 글로벌 에너지 분석기관에 따르면, 일본의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는 2024년 약 19TWh에서 2034년 약 57~66TWh 수준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이를 두고 본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일본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에 나섰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일본 데이터센터 확충을 위해 약 29억달러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도 일본 클라우드 인프라 확대에 약 150억달러를 쏟아붓기로 했다.
일본 전력망이 노후화된 점도 전력 인프라 투자가 늘어난 배경이다. 일본 송·변전 설비 상당수는 1960~1980년대 구축된 시설로 송전망 교체, 변전소 현대화 수요가 급증했다. 일본 정부와 전력회사들은 이를 해결하려 스마트 그리드 구축, 전력망 투자에 속도를 내는 중이다. 도쿄전력(TEPCO)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권 변전소와 송전망 확충에 나섰다. 간사이전력, 주부전력 등 주요 전력회사들도 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전력망 디지털화를 추진 중이다.
정리해보면 일본 전력 시장이 데이터센터 산업 성장, 재생에너지 확대, 노후 전력 인프라 교체라는 3가지 요인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자연스레 전력기기와 전력 인프라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를 눈여겨본 LS일렉트릭은 일본 시장에서 배전·전력기기, ESS, 전력 품질 안정화 솔루션 사업에 드라이브를 거는 중이다.
조욱동 LS일렉트릭 전무는 “스마트 배전 솔루션, 전력 관리 기술을 기반으로 일본 전력 인프라 시장을 공략해왔다”며 “일본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재생에너지, 글로벌 전력 인프라 프로젝트 공동 진출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사업 호조로 LS일렉트릭 실적은 날개를 달았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4조9658억원, 영업이익 4264억원을 기록했다. 매출, 영업이익 모두 사상 최대치다. 이한결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북미 빅테크 업체들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늘며 배전 시장 성장세가 본격화될 것”이라며 “올해 LS일렉트릭 영업이익은 6701억원으로 전년 대비 57%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로컬라이제이션’ 앞세워 매출 1000억원 목표

Q. LS일렉트릭이 일본 시장을 주목한 배경은.
A. 전 세계적인 탄소 중립 정책,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력 수급 변동성을 보완하는 ESS 수요가 커졌다. LS일렉트릭은 일본 시장 성장 가능성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일본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펼치는 한편 보조금 지원으로 ESS 보급 확대를 추진 중이다.
Q. 일본 시장 진입 조건이 까다롭다던데.
A. 일본은 전통적으로 자국 기업, 기술 신뢰도가 높아 해외 기업 진입이 까다로운 시장이다. 일본 ESS 시장에는 히타치, 도시바, 미쓰비시 등 강력한 현지 경쟁사들이 넘쳐난다. 이들 기업은 일본 전력회사와 오랜 협력 관계를 구축한 만큼, 계통 설비와 제어 시스템 경험이 풍부해 일본 시장 내 영향력이 크다. 외국 기업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LS일렉트릭 역시 초기엔 일본 시장 진입이 어려웠다. 기술력을 인정받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일본 특유의 까다로운 제도를 단순한 ‘규제’가 아닌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현지 가이드라인에 맞춘 제품 최적화 과정을 반복하며 일본 고객 신뢰를 확보해왔다. 단순히 제품만 파는 것이 아니라 시공부터 운영 관리까지 책임지는 파트너십을 강조하며 현지 고객의 두터운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Q. 차별화된 일본 시장 공략 방안이 있다면.
A. 핵심은 로컬라이제이션(Locali zation, 현지화)이다. 일본 전력 시장은 기술 기준, 품질 요구 수준이 높은 만큼 단순한 제품 공급만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ESS 핵심 장비인 PCS 품질 개선과 함께 전력 솔루션 구축에 필요한 설계·시공 노하우, 유지보수 체계 구축에도 힘쓰는 중이다. LS일렉트릭은 한국 파트너사의 일본 법인을 통해 설치 전 단계의 기술 지원부터 설치 이후 운영, 유지보수까지 긴밀하게 협력해 프로젝트 전 과정에서 안정적인 기술 대응 체계를 구축했다.
현지 조직 기반도 꾸준히 강화했다. LS일렉트릭은 일본 법인 설립 이후 약 15년 동안 차근차근 현지 인력을 육성해왔다. 일본어 소통 능력과 전기기사 자격을 갖춘 전문 인력들이 고객 밀착형 기술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이다. 한발 더 나아가 ESS와 초고압 전력 솔루션을 결합한 ‘턴키(Turn-key) 공급 확대’에 힘쓸 계획이다. 고압·특고압 ESS 시장에서 전력기기 공급부터 시스템 구축까지 통합 솔루션을 제공하는 방안이다.
최근 부산 공장의 초고압 변압기 생산 능력을 기존 대비 3배로 확대해 납기 경쟁력을 강화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멀리 보면 단순한 기자재 공급 기업을 넘어 일본 시장에서 가장 신뢰받는 전력·에너지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표다. 내년 일본 시장 매출 1000억원을 달성해 성장세를 이어갈 계획이다.
[도쿄(일본) =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3호(2026.04.01~04.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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