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떤 책이길래...무작정 인도 유토피아 찾아 떠난 그녀
[김상목 기자]
스페인 여성 '이네스'는 가족의 뿌리인 인도를 종종 여행한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인도,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발견한 소설 '술타나의 꿈'은 그녀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어준다. '술타나'는 군주를 칭하는 '술탄'의 여성형이다. 이제는 흥미가 떨어지던 선조의 땅 인도가 새롭게 읽히기 시작한다. 고정관념과 달랐던 인도의 낯선 풍경을 따르며 소설 원작자의 흔적을 찾는 여정을 통해 이네스는 자신이 현재 처한 삶과 작가가 활동하던 과거, 소설 속 유토피아에 관해 연결하며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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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타나의 꿈> 스틸 |
| ⓒ ㈜트리플픽쳐스 |
소설 속 레이디랜드의 성립과정과 사회상은 21세기 시각으로 봐도 전복적인 수준이다. 무의미한 이웃 나라와의 전쟁 속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 작은 나라가 여성들의 지혜로 어떻게 외적을 물리치고 평화를 되찾았는지, 그 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신했던 남성들이 그대로 집 안에 머물러 살게 되었는지 과정은 전근대의 단순한 몽상적 판타지와 궤를 달리하는 개연성으로 완성된다. 오히려 소설의 묘사는 시대를 훌쩍 앞서갈 정도다.
전쟁에 패배한 왕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몰렸다. 승전에 기세등등한 옆 나라 군주는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다. 전통적 군사력으론 도저히 가망이 없는 상황에서 왕국의 여성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힘을 합해 신무기를 개발하고 불리하던 전세를 뒤집는다. 30년 전 '레이디랜드'의 탄생이다.
소설 속 가공의 설정과 실제 이후 현대사를 비교하면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양차 세계대전에서 총력전 체제로 인해 부족한 노동력과 전쟁 공헌에 여성이 활약하며 사회진출과 권리 장전이 이뤄진 역사와 고스란히 닮았다. 현실에서도 여성의 참정권 확대나 그동안 진입이 허락되지 않던 직업군에 진출하게 된 배경 그대로다. 소설이 처음 등장할 때는 그저 허무맹랑한 판타지로만 치부되던 게 알고 보니 미래를 예견한 셈이다. 그만큼 시대를 앞선 상상력의 분출과 함께, 소설 속 레이디랜드와 정반대로 치닫던 당시 인도 여성의 현실에 착목한 작가의 비판적 시선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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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타나의 꿈> 스틸 |
| ⓒ ㈜트리플픽쳐스 |
이네스는 겉으론 모자랄 것 없는 삶을 누린다. 문화예술에 종사하며 가난과는 거리가 멀고 개방적 환경의 수혜자로 여겨지기 충분한 조건이다. 지적 대화를 나누며 구속하지 않는 관계를 갖는 연인과 친구도 있다. 여전한 성차별과 폭력이 종식되지 않은 3세계, 특히 자주 여행하러 들르는 인도의 상황과는 겹칠 구석이 없어 보인다. 여행자로서 그저 이국의 낯선 풍경을 즐기면 족할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이 누리는 조건에 만족하지 못한 채다. 어릴 적 어두워진 공원 벤치에서 느끼던 낯선 인기척에 대한 두려움은 관광객의 시선으로 응시한 현지의 여러 위협과 맞물려 국경을 초월한 여성의 안전으로 연결된다. 난폭하게 거리를 질주하는 택시, 얕보고 달려드는 야생 원숭이, 음흉한 시선으로 젊은 여성을 훑는 현지 남성들 시선이 모두 그녀가 평소 간직하던 불안과 어우러진다. 사라지지 않는 공포, 끝없는 갈망은 어떻게 풀 수 있을까?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하고자 들어간 서점에서 이네스는 운명처럼 흥미로운 책들과 만난다. 스페인보다 더 많은 여성 신화 연구가 인도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그녀에게 '술타나의 꿈'은 상상하지 못한 보물창고다. 빠져들 듯 책을 독파한 주인공 머릿속에서 100년 전 여성 소설가의 꿈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이제 레이디랜드는 여행 내내 천일야화처럼 떠나지 않는다. 소설가의 생애를 쫓으면 갈증이 풀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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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타나의 꿈> 스틸 |
| ⓒ ㈜트리플픽쳐스 |
험난한 장벽을 이네스는 여행에서 체험한다. 소설가가 의욕적으로 가산을 털어 설립한 여학교가 실패로 돌아간 동네.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 동네에서 체념 가득한 현지 여성들과 접촉한 주인공은 의기소침할 수밖에 없다. 영국에서 독립하고 21세기가 되었음에도 인도 여성 다수는 소설 속에서 레이디랜드가 탄생하기 전과 다를 바 없이 고립되고 짓눌린 삶에 갇혀 있다. 뜻을 공유할 친구도 만나고,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찾던 구도의 여정은 순탄함과 거리가 멀다.
기대와 다른 여행에 지친 이네스는 자꾸만 꿈으로 침잠하려 한다. 어딘가 레이디랜드가 정말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텐데. 이미 소설이 탄생하던 무렵, 서구 제국주의에 지친 이들이 3세계 오지를 찾아 헤매며 구원을 찾던 풍경에서 익숙한 반복이다. 현실 대안을 찾지 못한 서구 지식인들이 몽환과 도피로 귀의하던 오랜 관행에 그녀 역시 가라앉고 말 것인가.
주인공의 여정은 꿈과 현실을 왕복하며 울퉁불퉁하게 구현된다. 일직선 연대기가 아니라 무의식의 흐름처럼 진행되기에 관객은 종종 주인공 마냥 길을 잃기 쉽다. 100년 전 식민지 여성의 처참한 일상과 21세기 서구 여성의 조건이 동일시될 수 없다는 지적도 설득력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성에게 온전히 '안전한 땅'이 없다는 문제의식은 <술타나의 꿈>을 관통하며 일관되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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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타나의 꿈> 스틸 |
| ⓒ ㈜트리플픽쳐스 |
영화에 활용된 기술력은 작품 속 3개 동선 축에 따라 다채롭게 변주된다. 헷갈리기 쉬운 전개에서 어렵지 않게 포착 가능한 형식 선택은 일종의 길잡이 역할도 병행하는 셈이다. 그래서 화풍 변화 타임을 알아채는 게 이야기 소화에도 필수가 된다.
우선 주인공 이네스의 현실 부분에선 배경을 아날로그 수채화로 꾸민다. 물감이 번지듯 얼핏 깔끔함과 거리가 멀어도 사진과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 선택이다. 여기에 주인공 캐릭터만 디지털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해 배경에 파묻히지 않는 주체적 존재로서 이네스를 부각한다. 그저 눈요기가 아니라 주제의식과 조응하는 방법론을 채택한 것.
소설가의 전기 부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인도의 전통으로 계승되어온 그림자 인형극을 과감히 도입한다. 오랜 역사 원형 그대로 계승된 인형극을 통로로 연결되는 이네스와 베굼 로케야 호사인의 삶은 시간의 벽을 초월하게 된다.
주인공이 '사라 이모'를 가이드 삼아 꿈의 세계로 왕래하는 레이디랜드 묘사 역시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인도 특유의 헤나 타투, '메힌디' 여성 장인들과 협력해 완성한 장면들은 우리가 경탄하는 메힌디 양식의 정밀한 패턴을 고스란히 화면에 옮긴다. 초현실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헤나 타투의 시각화는 역설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어원인 유토피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환기를 주인공과 관객에게 동시에 제공한다.
<술타나의 꿈>을 온전히 소화하기 위해선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애니메이션의 시각효과를 제대로 관찰해야 한다. 대개 이야기 서사 중심인 극영화와 달리, 온전히 가상의 세계를 화면에 구현하는 애니메이션 독해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면 불편할 수 있지만, 집중력을 발휘해 주제와 영상을 통합해 응시한다면, 그 어떤 실사영화도 다가가기 힘든 눈부신 페미니스트 유토피아의 꿈을 뇌리에 새길 수 있게 된다. 한 세기 동안 여전히 누구도 도달할 수 없었던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각오를 굳힌 주인공의 꿈은 그 순간 관객에게도 공유될 테다.
영화를 보고 원작 속 레이디랜드가 어떻게 건설되고 유지할 수 있었나 궁금하다면 국내 출판된 소설을 찾아갈 때다. 과거 여성들이 겪던 암울한 일상과 전복을 꿈꾸며 상상하던 미래 풍경을 오늘날 현실과 비교 고찰하는 지적 체험이 기다린다.
<작품정보>
술타나의 꿈
Sultana's Dream
2023|스페인|애니메이션
2026.04.01. 개봉|86분|12세 관람가
감독 이사벨 에르게라
수입/배급 ㈜트리플픽쳐스
2024 48회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장편경쟁 콩트르샹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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