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했던 '전수조사'... 그 시절 훈장 받았던 수사관들의 실체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4. 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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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고문과 간첩조작의 역사...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김종성 기자]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정원. 2023.11.1
ⓒ 연합뉴스
지난달 29일에는 역대 독재정권하에서 고문과 간첩 조작 등으로 훈장·포장이나 표창을 받은 경찰들에 대한 전수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어 지난 1일에는 국가정보원에서 동일한 전수조사가 시작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앙정보부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시절의 국정원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라는 말을 들었다. 날아가는 새를 합법적으로 떨어트리지 않고 고문이나 조작 등으로 떨어트린 정보부 요원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번 조사를 통해 이뤄지게 된다. 이제는 그들이 떨어트림을 당하게 된다.

전두환 정권의 '간첩 생산'

과거의 간첩 수사는 '간첩 적발'이기보다는 사실상 '간첩 생산'이었다. 이북에서 남파된 간첩보다 서울 남산에서 남파된 간첩이 훨씬 많았다. '훨씬 많았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적어도 전두환 집권 이후에는 진짜 간첩사건보다 조작 간첩사건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 국정원의 자체 판단이다. 국정원이 2007년에 펴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학원·간첩 편(VI)>에 이런 문구가 있다.

"80년대 이후의 간첩사건에서 확실한 증거가 나온 사례는 별다른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은 사례에 비해 훨씬 적다."

국정원과 보안사 등에서 자주 구사되던 논리가 있다. '간첩 사건에는 증거가 없다'는 논리다. "간첩이란 고도의 훈련을 받아서 매우 은밀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증거를 남기지도 않고 찾기도 어렵다"는 변명이 공안기관에서 자주 언급됐다고 위 보고서는 말한다. '간첩들이 어떤 놈들인데 증거를 남기겠느냐'는 식의 논리가 회자됐던 것이다.

위 보고서는 보안사령관 출신인 전두환도 그런 시각을 갖고 있었다고 알려준다. 1980년대부터 간첩사건 수사가 한층 부실해진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정보기관 수사관들이 사흘 정도 피의자의 기력을 빼놓은 뒤에 시키는 것이 있었다. 출생 직후부터 현재까지의 전 과정을 16절지 갱지에 쓰는 자서전(자술서) 작성이다. 1985년에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붙들린 황대권의 경우에는, 두 달간 자서전 집필에 쓴 누런 갱지가 거의 책상 높이였다고 한다. 볼펜은 열두 자루 사용됐다.

자서전을 쓰는 동안에 피의자들은 툭하면 얻어맞았다. 위 보고서에 예시된 바에 따르면, '몇월 며칠에 서울 종로 술집에서 친구를 만났다'고 적으면, 수사관들이 똑바로 쓰라며 구타했다. 수사관들은 '몇월 며칠에 동지를 포섭하고 정세를 파악할 목적으로 서울 종로 술집에서 친구를 만나 학생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부 비방 발언을 했다'는 식으로 고쳐 쓰라고 '첨삭 지도'를 해줬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영복(1941~2016)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도 그런 식의 자서전 집필로 인해 자기 인생이 왜곡되는 것을 괴로워했다. 1968년에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한 그의 경험을 국정원 보고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신영복도 '구타와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 십 장의 자술서와 몇 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는 것이다."

1982년 9월 10일, 안기부는 북한 주민 송창섭의 남한 가족과 친척으로 구성된 총 28명의 간첩단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송씨 일가 간첩사건). 이때, 송씨가 아닌데도 구속된 인물이 당시 69세인 한광수 전 이화여대 음대 교수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안기부가 송창섭의 사촌처남인 한광수의 혐의를 입증할 목적으로 내놓은 증거는 등산복·등산모와 일제 우산이었다. 북한 상품도 아닌 이런 물건들만 가지고는 간첩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안기부는 한광수가 간첩 활동을 할 때 이 등산복과 등산모를 착용했으며, 송창섭의 남한 부인인 한경희가 한광수의 회갑 선물로 일제 우산을 구입할 때 송창섭이 보낸 공작금을 썼다고 주장했다.

1982년 2월 12일, 안기부는 주민이 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 섬에서 간첩들을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했다(미법도 간첩사건). 다음날 <조선일보>는 "국가안전기획부는 서해 휴전선에 인접해 있는 경기도 강화군 미법도를 거점으로 한 어부 간첩조직과 관련해 7명을 검거"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6년간 수감된 당시 40대 초반의 어민인 정영은 증거라고 할 수도 없는 증거로 엮였다. 위 국정원 보고서에 제시된 정영 사건의 증거품 목록에 적힌 것은 무당 모자, 무당 옷, 창호지, 100원권 지폐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정영이 북쪽으로부터 받은 공작금으로 이런 무속 물품을 산 뒤 거기에 절을 올렸다고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들 역시 위 물품들이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사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위 보고서에 인용된 안기부 인천분실의 수사상황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부정적인 면: 피의자들의 범법사실 인정 외 물증 무(법정에서 부인할 경우, 방증자료 전무)"

자백 외에는 물증이 없으며 정영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경우에는 유죄 증거가 전무하게 된다고 안기부 내부문건에 적혀있던 것이다. 멀쩡한 사람을 이런 식의 수사로 무기수로 전락시켰다.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과거를 성찰하는 법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박종철 열사의 추모 공간이 마련되어있는 모습. 509호는 박종철 열사가 경찰 물고문을 받다 숨진 조사실이다. 2021.6.10.
ⓒ 공동취재사진
과거의 국정원이 엉터리 조작을 많이 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인물이 중앙정보부 초대 부장 김종필이다. 그는 김재규 부장이 일으킨 10·26사태로 중앙정보부의 위상이 추락하고 보안사의 위상이 높아진 뒤에 보안사로 끌려가 수사를 받았다. 이때 그가 염려한 것은 자신도 엉터리 조작의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전두환의 제2차 쿠데타가 일어난 1980년 5월 17일 심야에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된 김종필은 다음날부터 조사를 받았다. 이때 그가 수사관들에게 당부한 내용이 <김종필 증언록> 제2권에 적혀 있다.

"사실무근한 것, 없는 것을 꾸며내서는 안 되네. 당신들이 조사한 기록은 언젠가 세상 앞에 드러날 것이고, 그때 진실이 밝혀질 테니까."

반공정권하의 간첩 수사는 '과학'이 아니었다. 그냥 공권력으로 밀어붙여 간첩을 만들어내는 조작극이었다. 만약 12·3내란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런 조작극이 또다시 활개를 쳤을 수도 있다. 그 같은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정원의 과거 관행이 좀 더 명확히 재조명되고 엉터리 공로로 훈장·포장·표창을 받은 요원들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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