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이재명 대통령은 '공화주의'? 그 해석의 한계

이병권 2026. 4. 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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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이병권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1일 청와대에서 열린 비상경제점검회의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6.4.1
ⓒ 연합뉴스
지금 한국 정치권에서는 이재명 정부를 둘러싼 해석 경쟁이 이미 시작됐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실용주의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중도개혁이라 하며, 또 어떤 이는 '공화주의'라는 말까지 가져다 붙입니다.

최근, 한 유명 유튜버 진행자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두고 '공화주의를 경제적 자유주의의 문법으로 펼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얼핏 세련되고 통찰력 있게 들리는 말입니다. 실제로 지금의 이재명 정부는 시장을 전면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조정 기능과 공공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혼합적 성격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념은 장식품이 아닙니다. 잘못된 개념은 잘못된 현실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공화주의는 그렇게 자의적으로 끌어다 붙일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공화주의(共和主義, Republicanism)는 단순히 "공공성을 중시하는 정치"나 "민중 친화적인 통치"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먼저 권력을 어떻게 제한하고,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든, 르네상스 피렌체의 공화주의든, 시민혁명 이후의 근대 공화국이든, 공화주의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다는 추상적 선의가 아니라, 누구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제도적 구조였습니다.

이 점에서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와도 구별됩니다. 민주주의가 "누가 지배하는가", 즉 주권의 주체를 묻는다면, 공화주의는 "그 권력이 어떻게 통제되는가"를 묻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를 제도화하는 원리이고, 공화주의는 그 다수의 의사로 행사되는 권력조차 자의적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주권의 문제라면, 공화주의는 그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문제입니다. 이 둘은 서로 겹치지만, 결코 같은 말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공화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국민주권과 권력분립, 견제와 균형을 함께 지켜야 할 헌정의 원리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표현이 등장했을까요.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유명 유튜버 진행자는 아마도 이재명 정부가 성장과 산업, 시장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공공성과 국가 조정의 필요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유방임적 시장주의를 그대로 따르지는 않으면서도, 국가가 시장과 산업을 활용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경향을 직관적으로 포착한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표현은 이재명 정부의 정책적 혼합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런 해석은 현재의 정부 운영을 설명하는 데 일정 부분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곧바로 "공화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순간, 개념은 흐려지고 권력에 대한 비판적 감시도 약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화주의는 정책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를 평가하는 기준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어떤 정부가 산업정책을 강조하고, 시장을 활용하고, 공공성을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화주의적 정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엄격한 질문이 따라붙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권한은 어디까지 제어되고 있는가. 국회와 사법부, 행정부 사이의 균형은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가. 검찰과 사법 카르텔의 자의적 권력은 해체되고 있는가. 관료제와 국가기구는 시민의 통제 아래 놓이고 있는가. 공화주의는 바로 이 질문을 피하지 않는 정치입니다. 따라서 정책의 조합이 아니라, 권력의 제도적 운영이 먼저 검증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공화주의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는 해석은 바로 이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첫째, 아직 제도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권력 운영을 너무 이른 단계에서 정당화하거나 미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둘째, 대통령 개인의 통치 스타일이나 정책 감각을 공화주의라는 높은 정치철학의 언어로 포장함으로써, 정작 더 중요한 제도 개혁의 실질을 흐릴 수 있습니다. 셋째, 독자와 시민들이 "공공성을 말하니 곧 공화주의"라는 느슨한 인식에 익숙해질 경우, 공화주의가 본래 갖고 있던 비판적이고 제도적인 의미는 점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위험한 이유는 결국 하나입니다. 권력의 실질을 보지 않고, 권력의 언어만 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치에서는 언제나 "좋은 뜻"과 "공공의 명분"이 쉽게 동원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이 무너지는 과정도 언제나 그런 말들 속에서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시민은 어떤 정부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시장을 활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공공성을 말한다고 해서 곧 공화주의적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이 시민 위에 군림하는가, 아니면 시민의 통제 아래 놓이는가입니다. 어쩌면 이재명 정부 역시 실용을 바탕으로 이러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 더 좋은 공화주의, 더 나은 민주주의는 무엇일까요. 답은 생각보다 분명합니다. 더 좋은 공화주의는 특정 지도자의 선의나 정치적 감각에 기대는 정치가 아니라, 누구도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정치입니다. 검찰과 사법 권력의 자의성을 줄이고, 행정 권력의 설명 가능성과 책임성을 높이며, 공직자의 이해충돌을 제도적으로 통제하고, 시민이 권력에 대해 실질적으로 감시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 바로 이 지점에서 공화주의는 비로소 현실이 됩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다수의 의사를 빠르게 관철하는 체제가 아닙니다. 그 다수의 의사조차도 헌정 질서와 시민의 자유,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제어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재명 정부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권력이 검찰과 사법, 관료제와 시장 권력을 실제로 통제하고, 시민의 자유와 민주공화국의 제도를 얼마나 넓혀내는가입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빠른 결단과 강한 국가에 대한 유혹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민주공화국은 속도와 카리스마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권력을 나누고, 서로를 견제하고, 시민이 그 과정을 감시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더 큰 권력이 아니라 더 책임 있는 권력, 더 많은 통치가 아니라 더 정당한 통치입니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를 대신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두 축입니다. 그 두 축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권력의 이름이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중심에 둔 민주공화국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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