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자 집안은 왜 '대장금'을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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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지인과 함께 제주로 관광을 온 20대 초반의 유럽인 청년과 이틀에 걸쳐 저녁 식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간은 단순한 교류를 넘어, 대한민국이 가진 '문화의 힘'을 내 삶의 현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목격한 각별한 경험이었다.
그것이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문화, 그리고 우리 제주에 보내온 깊은 신뢰와 동경에 응답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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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훈 / 칼럼니스트 · 행정학 연구자

지난 주말, 지인과 함께 제주로 관광을 온 20대 초반의 유럽인 청년과 이틀에 걸쳐 저녁 식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그 시간은 단순한 교류를 넘어, 대한민국이 가진 '문화의 힘'을 내 삶의 현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목격한 각별한 경험이었다.
첫 만남부터 인상적이었다.
이방인 청년이 시종일관 고개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모습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녀의 유창한 한국어 실력이었다. 그녀는 일상적인 회화를 넘어 고급 한자어를 적재적소에 섞어 썼고, 대화 중 자신의 문법이 틀렸음을 인지하면 그 즉시 올바른 문장으로 스스로 수정하는 총명함까지 보였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이토록 정교하게 구사하는 비결이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학원에 다녔는지, 한국에 오래 거주했는지 묻는 내게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한국 드라마를 보며 독학했다"며 웃어 보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재로 삼은 작품들이었다. '허준', '대장금', '이산'. 한국인인 나조차 전편을 다 챙겨보지 못했던 이 묵직한 명작 사극들이 20대 유럽 청년의 언어와 정서를 키워낸 자양분이었다.
이야기의 이면에는 특별한 가정환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청년은 대를 이어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집안 출신이다. 자녀 양육에 남다른 철학이 있었던 부모님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요소가 여과 없이 노출되는 서구의 상업 미디어 콘텐츠가 아이들의 정서 발달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건전하고 교육적인 대안을 찾던 부모님의 눈에 띈 것이 바로 한국의 사극이었다.
권선징악의 뚜렷한 서사, 어른을 공경하는 예의와 가족 중심의 가치관, 생명을 향한 존중, 그리고 혹독한 시련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정진하는 주인공의 끈기. 유럽의 교육자 부모는 이 낯선 동양의 드라마 속에서 자신들이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가치관을 발견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화면 너머로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한 이 청년은 어느덧 훌륭하게 성장해 현재 한국의 한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다. 휴가를 맞아 제주를 찾은 그녀는, 앞으로 돈을 더 모아 유럽의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제주를 방문할 것이며, 훗날 자신의 신혼여행 역시 주저 없이 제주로 오겠다는 따뜻한 계획을 들려주었다.
연구자로서 조셉 나이(Joseph Nye)가 주창한 '소프트 파워(Soft Power)'나 '문화적 자본' 같은 학술적 용어들을 무수히 접해왔다. 한국 미디어 콘텐츠의 글로벌 흥행 소식도 일상처럼 접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텍스트와 통계로만 존재하던 '한류'라는 거대한 담론이, 한 개인의 삶과 가치관을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유행을 넘어선, 실로 묵직하고 거대한 문화의 위력이었다.
한류의 진정한 힘은 화려한 시각적 연출이나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당연하게 여겨왔던 고유한 정신적 가치,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예의,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선한 의지야말로 국경과 인종을 넘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제주의 밤바다를 배경으로, 한국의 고전 사극을 이야기하며 눈을 반짝이던 이방인 청년의 모습이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밖에서 불어오는 한류의 훈풍에 자만하기보다, 우리 안에 내재된 문화적 자산과 가치들을 다시 한번 소중하게 다듬고 가꾸어야 할 때다. 그것이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문화, 그리고 우리 제주에 보내온 깊은 신뢰와 동경에 응답하는 길일 것이다. <김대훈 / 칼럼니스트 · 행정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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