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2026. 3. 31. 03:1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창우 박사의 첨단재생의학 <49>


외래 진료 중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선생님, 저는 원래 건강했는데요.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 이 말엔 억울함이 담겨 있다.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몸이 오늘 갑자기 배신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오래 지켜본 의사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 질병은 뒤늦게 발견된 것에 가깝다. 실제로 병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이 갑작스러울 뿐이다.

한 50대 남성이 무릎 통증을 호소하며 내원한 적이 있다. 계단을 내려갈 때 무릎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고 며칠 사이 통증이 급격히 심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검사를 진행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연골은 이미 오래전부터 닳아 있었고 관절의 구조적 균형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느낀 며칠 사이의 변화는 실제로는 수년간 진행된 변화의 마지막 표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건강을 지금 괜찮은 상태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통증이 없고 일상생활이 가능하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건강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은 그 흐름의 끝에서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문제는 이 흐름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만을 경험하고 과정은 놓친다.

몸은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몸의 변화에는 방향이 있는데 어떤 방향과 속도로 움직이는지가 관건이다. 지금 통증이 없다는 사실보다 그 상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임상에서는 단순히 현재의 수치만 보지 않는다. 그 수치가 어떤 흐름 속에 놓여 있는지를 본다. 같은 검사 결과라도 어떤 사람은 회복의 방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악화의 방향에 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그 안의 방향성은 전혀 다르다.

질병은 단번에 발생하지 않는다. 초기에는 그 변화가 매우 완만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을 지나면 기울기는 급격히 가팔라진다. 그때부터 변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통증이 갑자기 심해지고 기능이 빠르게 저하되며 수치가 급격히 변한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병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이후다.

이 시점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개입의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생활의 조정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을 바꿀 수 있던 문제가 이 단계부터는 약물이나 시술, 때로는 수술까지 필요하게 된다. 같은 질병이지만 어느 시점에서 개입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든다. 임상에서는 늘 같은 아쉬움이 반복된다. “조금만 더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질병의 흐름에 분명한 전환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 전환점 이전엔 작은 변화로도 흐름을 바꿀 수 있다. 그 이후에는 같은 노력으로도 결과가 달라진다. 문제는 대부분 사람이 이 전환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시점에는 아직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아프지도 않은데 왜 관리해야 하느냐”고.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아프기 전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었는가”라고.

몸은 항상 신호를 보낸다. 다만 그 신호가 크지 않아 생활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다. 피로가 조금 늘어나고 회복이 조금 느려지며 이전보다 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방향을 보여주는 단서다. 이 신호를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방향으로 변화가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다.

결국 건강의 본질은 지금 괜찮은가가 아니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결과만 맞이하게 된다. 병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 흐름을 너무 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이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몸을 지은 분은 이미 그 안에 질서와 회복의 길을 함께 두셨다. 그 흐름을 읽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건강을 다시 붙잡게 된다.

선한목자병원장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