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글씨엔 이야기가 있다…김진표의 아름다운 악필 대회
![한국파이롯트 대표이자 가수 김진표. [사진 한국파이롯트]](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31/joongang/20260331000529628mpse.jpg)
악필(惡筆). 잘 쓰지 못한 글씨다. 자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이 악필이 자랑거리가 되는 대회가 있다. 바로 지난 26일 시작한 ‘고함 악필 대회’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글씨는 없다’는 대회 슬로건에 따라 예쁘지 않아도 의미 있는 손글씨를 온라인으로 응모 받는 대회다.
이 대회는 필기구 유통사 한국파이롯트 대표이자 가수 김진표의 기획으로 만들어졌다. 외조부인 한국파이롯트 창업자 고(故) 고홍명 회장의 유지에 따라 ‘고홍명·함은숙 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내세운 첫 프로젝트다.
![26일 시작한 ‘고함 악필 대회’ 포스터. [사진 한국파이롯트]](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31/joongang/20260331000529871bgav.jpg)
한국파이롯트의 역사는 1954년 고홍명 창업주가 세운 ‘신화사’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파이롯트 한국 총판으로 기술 제휴를 통해 1964년 한국 최초로 만년필을 생산하는 등 국내 필기구 산업을 개척했다.
남성 듀오 ‘패닉’으로 잘 알려진 김 대표는 지난 2015년 회사에 합류했다. 2016년 고 창업주의 타계 후 2017년부터 대표로 일하고 있다. 회사로 출근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록을 살펴보는 일. 1980년대 후반 전성기를 찍고, 이후 필기구 시장의 하락세와 함께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왔던 한국파이롯트와 할아버지의 흔적을 하나로 꿰어 정리했다.
김 대표는 “늘 기록하는 분이었기에 많은 자료가 남아 있었다”며 “거래처 서류는 물론 도면, 근무 일지, 팩스, 할아버지의 사적 편지나 일기 등을 살펴보면서 회사와 할아버지 관련 구체적인 일들까지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악필 대회 기획의 영감이 된 고홍명 창업주의 일기. [사진 한국파이롯트]](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3/31/joongang/20260331000530081dsfw.jpg)
새삼 느낀 것이 바로 기록의 힘이다. “생전에는 어려워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돌아가신 후에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는 김 대표는 실제로 할아버지의 일기에 한 장 한 장 해설까지 붙인 10권의 파일을 보관하고 있다.
일기 마지막 장은 2015년 2월. 아흔의 할아버지는 흐트러진 글씨로 “오래간만에 日記(일기) 쓰려 하나 氣力(기력)이 떠러져서..”라며 일상의 기록을 이어갔다. 김 대표는 “젊은 시절 쓴 일기와는 글씨체부터 다른 이 기록에서 어떤 울림을 느꼈다”고 했다.
평생 필기구 사업에 매진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문화재단을 만들면서 달필이 아닌 악필 대회를 떠올린 배경이다. 김 대표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진폭을 담은 글씨가 더 와 닿을 수 있다는 취지를 담은 행사”라고 설명했다.
이번 악필 대회를 시작으로 고홍명·함은숙 문화재단은 앞으로도 ‘쓰기를 지지하는 재단’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쓰기와 기록에 관한 여러 창작자, 예술가를 지원하고 관련 문화 활동을 지속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인류가 사라질 때 마지막까지 남는 도구는 펜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요한 계약에 서명하고, 연애편지를 쓰고, 자필 사과문을 적는 것처럼 쓰기는 나의 정체성을 글씨에 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고함 악필 대회의 응모는 내달 10일까지다.
유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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