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상장’ 원칙 금지...유탄 맞은 기업들
정부가 모회사와 자회사 중복상장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기로 하자, 국내 대기업 자본 조달 전략에도 큰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바늘구멍’ 같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중복상장을 원천 금지해 모회사 일반주주 권익 침해를 막겠다는 게 정부 방침이다. 상장 준비 단계에서 외부 투자금을 유치했던 일부 대기업 집단은 값비싼 ‘청구서’를 받아 들게 됐다. 자회사 기업공개(IPO)를 추진해온 상당수 기업도 험로가 예상된다.
중복상장, 韓 18.4%
美·日 비교해 현저히 높아
중복상장은 모회사가 상장된 상태에서 자회사를 상장시켜 모·자회사가 동시에 상장된 구조를 뜻한다. IBK투자증권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국내 증시의 중복상장 비율은 18.4%다. 이는 일본(4.3%), 대만(3.1%), 중국(1.9%), 미국(0.3%) 등 주요국과 비교해 현저히 높다.
국내에서 모자회사 동시 상장이 많은 것은 한국만의 특수한 배경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국은 지주사 도입이 1999년으로 상대적으로 늦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부실 계열사 구조조정 촉진 등의 목적으로 지주사를 허용했는데, 이미 다수 계열사가 상장된 상태였다. 순환출자 등 복잡한 지배구조를 그대로 둔 채 지주사 상장을 허용하다 보니 모자회사 동시 상장이 불가피했던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주요 대기업 집단의 잇단 중복상장이 한국 증시 디스카운트 심화 요인으로 입길에 오른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모자회사 동시상장은 투자자에게 이익의 최종 종착지가 불명확하다는 신호를 준다. 자회사가 좋은 실적을 내도 그 과실이 자회사 주주에게 온전히 돌아갈지, 배당·내부 거래·사업 재편을 거쳐 모회사나 지배주주에게 이전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둘째, 이런 구조에서는 지배주주와 일반주주 간 이해상충 우려가 커진다. 모회사와 자회사 주주가 서로 다르지만, 모회사 지배주주는 적은 현금흐름 권리로 포괄적인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어느 회사에 이익을 남기고 어느 회사에 비용을 배분할지 일반 투자자 의구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셋째, 물적분할의 경우, 모회사 주주 입장에서는 원래 자신이 투자했던 핵심 성장 사업이 별도 법인으로 떨어져 나가 ‘핵심 사업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다. 넷째, 이 과정에서 시장은 모회사와 자회사 어느 쪽에도 충분한 프리미엄을 주지 못한다. 모회사는 핵심 사업이 분리돼 지주사 할인이 심화하고 자회사는 모회사와 얽히고설킨 관계 탓에 중복상장 할인 우려를 짊어진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 5200조원 중 중복상장 시총이 1000조원을 넘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규제든 법적이든 원천적으로 금지하면 밸류에이션이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상장도 규율
지난 3월 18일 정부가 청와대에서 ‘자본 시장 정상화 간담회’를 열고 ‘자본 시장 체질 개선 방안’ 추진안을 발표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모자회사 중복상장에 대해 ‘원칙 금지·예외 허용’으로 방향을 잡고 세부 기준을 마련한다. 상세 기준은 올 2분기 거래소 상장 규정 개정을 통해 확정한다.
중복상장 범위도 확대된다. 현재 거래소 상장 규정은 분할 후 중복상장(쪼개기 상장)에 대해서만 “주주 보호 노력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라는 다소 모호한 기준으로 규율한다. 앞으로는 ‘인수·신설 자회사’도 실질적 지배력이 있다면 중복상장 유형으로 심사를 받을 전망이다.
이에 따라 중복상장 범위는 ① 상장회사의 외부감사법상 종속회사 ② 상장회사의 공정거래법상 계열회사로 수직적 지배관계에 있는 회사(손자회사 등 포함)를 상장하는 경우로 규정된다. ‘상장 필요성·주주 소통·주주 보호·경영과 영업 독립성’ 등을 깐깐히 따져 엄격한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중복상장을 허용하겠다는 방침이다.
금융당국은 해외 중복상장도 규율에 나선다. 당국은 오는 6월까지 자회사 중복 상장 시 모회사 이사회에 주주 충실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으로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마련한다. 지금까지는 거래소 상장심사로 중복상장을 다뤄왔지만, 자회사가 해외 거래소에 상장할 경우 직접 규율에 한계가 있었다. 금융당국은 이런 공백을 메우려 모회사 이사회가 해외 중복상장에 대해서도 주주 충실 의무를 지도록 통제 범위를 넓힌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 대표는 “중복상장 구조에서는 지배주주가 최소 자본만 투입하고도 계열사 확장과 지배력 유지가 가능하다”라며 “거래소 차원에서 상장 자회사 비율을 주요 지표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금 조달 전략 다변화 불가피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상장 전 지분투자(Pre-IPO)를 받은 기업이다. 상장 전 지분투자는 통상 일정 시점 내 기업공개(IPO)를 전제로 자금을 조달한다. 상장이 막히거나 크게 지연되면 재무적 투자자 지분을 웃돈을 얹어 되사는 등 실질적인 재무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상장 기한과 수익 보전 조건이 함께 걸린 SK에코플랜트가 대표 사례다. 2022년 재무적 투자자는 SK에코플랜트 전환우선주(CPS) 6000억원·구주 2000억원어치를 인수하며 4년 내 상장을 조건으로 주주 간 계약을 맺었다. 현재로선 상장은 사실상 무산됐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지난해 미국 자회사 매출 과대계상 문제로 금융당국 회계처리 위반 제재를 받아 상장예비심사 통과 가능성이 낮아진 데다, 중복상장 원천 금지 기류까지 겹친 탓이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SK에코플랜트가 재무적 투자자 지분 매입으로 자금 상환에 나설 가능성을 점친다. 쟁점은 상장 무산의 고의·중과실 여부다. 통상 CPS 발행 때 주주 간 계약에는 일정 기한 내 IPO가 무산되면 대주주나 지정 제3자가 투자 지분을 원금에 약정 내부수익률(IRR)까지 더해 사들이도록 하는 매도청구권(풋옵션)이 들어간다. SK에코플랜트도 고의나 중과실로 IPO가 무산될 경우 약 12%의 내부수익률을 재무적 투자자에게 보장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문에 IPO 무산에 따른 위약벌 조항 적용 여부를 두고 양측 기싸움이 벌어질 것으로 시장은 바라본다. 자본시장법 전문 변호사는 “시장 급락, 제도 변경, 거래소 정책 변화, 전쟁·팬데믹 같은 불가항력 사유라면 면책 논리가 생긴다”라고 말했다.
현재 재무적 투자자들은 위약벌 조항에 준하는 12% 수준 내부수익률 보장을 기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SK그룹 측은 연 5% 안팎 수익률 보장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다. IB 업계 관계자는 “매입 의무가 없는 구주까지 되산다면 IRR을 더 낮출 수 있을 것”이라며 “12%와 5%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LS 증손자회사 에식스솔루션즈도 상장 전 지분투자로 유치한 자금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판이다. 이 회사는 2030년 8월까지 상장 못할 경우 투자자에게 연 5%대 수익 보장 조건이 달린 것으로 알려진다. 중복상장 규제로 상장 일정이 지연되거나 무산될 경우 보장 수익률을 반영한 상환 부담이 현실화할 수 있다.
한화에너지와 SK플라즈마도 중복상장 규제 강화의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큰 사례로 꼽힌다. 한화에너지는 지난해 말 오너 일가가 보유한 약 1조1000억원 규모 지분을 외부 투자자에게 매각하며 일정 기간 내 상장을 약속했다. 한화에너지가 ㈜한화 최대주주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자회사 상장과 반대인 ‘모회사 상장’에 해당하지만, 규제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시각이 많다. 내년 초까지 상장을 약속한 SK플라즈마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외 상장을 저울질하던 다른 대기업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HD현대도 중복상장 규제 강화를 비껴가기 힘들다는 평가다. HD현대는 2020년 로봇사업부를 물적분할해 HD현대로보틱스를 설립한 뒤 현재 80%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자회사 상장을 추진해온 만큼 규제 강화 시 당국 심사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롯데그룹도 마찬가지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롯데지주와 롯데홀딩스, 호텔롯데 등이 주요 주주다. 대규모 설비투자 부담을 고려할 때 IPO가 유력한 자금 조달 수단으로 거론됐지만, 중복상장 규제 기조 아래 상장 추진 동력이 약화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그룹도 중복상장 규제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시장에서는 보스턴다이나믹스 해외 상장으로 정의선 회장이 구주 일부를 현금화해 지배력 확대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정부가 국내 거래소 심사 강화에 그치지 않고 모회사 이사회에 주주 충실 의무를 보다 무겁게 부과하는 방안을 함께 추진하면서 해외 상장도 중복상장 규제 영향권에 들어서게 됐다.
다만, 재계 일각에서는 지주사 제도를 장려하면서도 자회사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까지 틀어막는 것은 정책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나온다. 현 지주회사 체제는 지배구조를 단순·투명하게 만드는 대신 자회사 지분을 일정 수준 이상 보유하도록 한다. 즉,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 확보에 쓸 돈부터 마련해야 하므로, 신사업 자금을 마련할 선택지가 제한적이라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중복상장을 문제 삼는 이유는 이 과정에서 모회사 일반주주 가치가 훼손되는 사례가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은 자금 조달 때 자회사 상장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다. 모회사 차원에서 회사채나 전환사채, 신주 발행으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많다. 자회사 상장이 필요하더라도 일부 지분만 먼저 시장에 내놓는 ‘카브아웃(Carve-Out)’ 이후 최종적으로 ‘스핀오프(Spin-Off)’를 통해 완전히 분리하는 방식이 더 일반적이다. 이는 집단경영이 일반적인 한국보다 미국 시장이 지배주주와 소수주주 간 이해상충 우려가 덜한 데다 자본 시장 저변이 훨씬 두텁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사정이 이렇자 대기업 자금 조달 전략 다변화는 불가피한 선택이 됐다는 진단이다. ▲그룹 차원 추가 출자 ▲비핵심 자산 매각과 지분 담보·유동화 ▲사업별 구조화 금융 등으로 다변화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안상준 한국VC협회 부회장(코오롱인베스트먼트 대표)은 “인수합병(M&A)까지 중복상장이라고 원천 차단하면 모기업 자금 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라며 “국내 M&A 시장이 더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김형균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부회장(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은 “자회사 주식 전부를 모회사 주주에게 나눠주면 별도 절차 없이 허용하고 배당소득세 면제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3호(2026.04.01~04.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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