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할아버지 일기 보며 구상...김진표가 ‘악필 대회’ 여는 이유 [비크닉]
악필(惡筆). 잘 쓰지 못한 글씨다. 자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이 악필이 자랑거리가 되는 대회가 있다. 바로 지난 26일 시작한 ‘고함 악필 대회’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글씨는 없다’는 대회 슬로건에 따라 예쁘지 않아도 의미 있는 손 글씨를 온라인으로 응모 받는 대회다.

이 대회는 필기구 유통사 한국파이롯트 대표이자 가수 김진표의 기획으로 만들어졌다. 외조부인 한국파이롯트 창업자 고(故) 고홍명 회장의 유지에 따라 ‘고홍명·함은숙 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내세운 첫 프로젝트다. 달필 아닌 악필을 겨룬다니. 대체 어떤 사연인지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돈화문로 사옥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10권의 일기, 기록은 힘이 세다
‘빠이롯드만년필’과 ‘하이테크-C’, 그리고 대한항공 볼펜. 중장년층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 써봤을 한국파이롯트 필기구다. 혹은 연말이면 타종 행사를 하는 보신각 옆 ‘빠이롯드만년필’ 전광판으로 이 회사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업력만 72년. 한국파이롯트가 꽤 친숙한 이유다.
한국파이롯트의 역사는 1954년 고홍명 창업주가 세운 ‘신화사’로부터 시작된다. 일본 유학 시절 문구 유통을 하던 지인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에 문구사를 차렸고, 이후 일본 파이롯트와 연이 닿아 한국 총판이 되어 기술 제휴를 하게 된다. 1964년 한국 최초로 만년필을 생산했다. 이후 국내 최초 사인펜, 샤프펜슬 등을 생산하며 국내 필기구 산업을 개척했다.

남성 듀오 ‘패닉’으로 잘 알려진 김 대표는 지난 2015년 회사에 합류했다. 2016년 고 창업주의 타계 후 2017년부터 대표로 일하고 있다. 회사로 출근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각종 기록을 살펴보는 일. 1980년대 후반 전성기를 찍고, 이후 필기구 시장의 하락세와 함께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왔던 한국파이롯트와 할아버지의 흔적을 하나로 꿰어 정리했다.
김 대표는 “늘 기록하고 뭔가를 쓰는 분이었고, 뭐든지 버리지 못하는 분이었기에 상당히 많은 자료가 남아 있었다”며 “거래처와의 서류는 물론 각종 도면, 근무 일지, 팩스, 할아버지의 사적인 편지나 일기 등을 살펴보면서 회사나 할아버지와 관계된 구체적인 일들까지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새삼 느낀 것이 바로 기록의 힘. “생전에는 어려워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돌아가신 후에야 더 잘 알게 된 것 같다”는 김 대표는 실제로 할아버지의 일기에 한 장 한 장 해설까지 정성스레 붙인 10권의 파일을 보관하고 있다. 필기체에 한자가 뒤섞여 한눈에 알아보기 힘든 일기를 약 2년간의 분투 끝에 해석한 결과물이다.
“기력이 떠러져서...” 흐트러진 글씨의 울림
일기 파일을 살펴보니, 1969년 6월 당시 한창이던 40대의 나이에 가족 걱정, 회사 걱정, 나라 걱정을 하던 청년은 2015년 2월 아흔의 나이에 이런 일기를 남긴다. 당시 고홍명 창업주는 태국에 설립한 ‘파이롯트 펜 타일랜드 주식회사’에 머물고 있었다.

일기 파일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의 대조. 김 대표는 “글씨체부터 다른 이 기록의 간극에서 어떤 울림을 느꼈다”고 했다. 흐트러진 글씨로 하루의 사소한 기록을 이어간 할아버지에게 느낀 인간적 애정, 유대감이지 않을까.
평생 필기구 사업에 매진한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문화재단을 만들면서 달필이 아닌 악필 대회를 떠올린 배경이다. 반듯한 글씨는 아니지만, 오히려 선명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악필이 더 의미 있게 느껴졌다. 김 대표는 “흔히 글씨는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쁜 마음만 가치 있는 걸까 생각해 봤다”며 “자연스러운 감정의 진폭을 담은 글씨가 더 와 닿을 수 있다는 취지를 담은 행사”라고 설명했다.
쓰는 것을 지지하다
최근 한국파이롯트는 대형 문구 페어에 참여하는 등 2030 소비자와 접점을 늘리는 데 여념이 없다. 학령기가 지나면 필기구를 손에 쥐는 경험 자체가 줄어들기에 쓰기와 관련한 다양한 경험을 늘리려는 목적이다. 잘 쓴 글씨든, 못 쓴 글씨든 손으로 쓴 글씨 자체가 진귀한 시대다.

이번 악필 대회를 시작으로 고홍명·함은숙 문화재단은 앞으로도 ‘쓰기를 지지하는 재단’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쓰기와 기록에 관한 여러 창작자, 예술가를 지원하고 관련 문화 활동을 지속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인류가 사라질 때 마지막까지 남는 도구는 펜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요한 계약에 서명하고, 연애편지를 쓰고, 자필 사과문을 적는 것처럼 쓰기는 나의 정체성을 글씨에 담는 일”이라며 “반듯하거나 예쁘지 않아도 좋으니 진심을 담은 아름다운 글씨를 많이 보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 고함 악필 대회의 응모는 내달 10일까지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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