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 잘못 찍었다가 편집국장 구속... 이승만 시대의 언론탄압

박만순 2026. 3. 3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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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기억여행 1945~1960 35화] 4사5입 개헌부터 설렁줄 감시까지, 전체주의로 치닫던 1950년대

잊혀진 충북 청주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해 청주 기억여행을 떠납니다. 해방 직후부터 1960년 4·19 혁명 시기까지 청주에서 있었던 정치, 사회 사건을 살펴보고 지역 현대사를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이 작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근현대사 역사 텍스트를 만드는 길입니다. 또한 민주주의, 인권, 평화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길이기도 합니다. <기자말>

[박만순 기자]

성안길 곳곳에는 "편집국장 김창기를 해외로 추방하라", "국민일보를 폐간 조치하라"는 등의 벽보가 나붙었다. 1953년 5월 <국민일보>가 대통령(大統領)을 견통령(犬統領)으로 잘못 인쇄하는 사고를 낸 것이다. 큰 '대(大)' 자에 점을 하나 잘못 찍은 것이다.

조판 과정에서의 단순한 실수였지만 1950년대 이승만 시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충청북도의회와 청주시의회에서는 '국민일보 폐간 건의안'을 결의했다. 이로 인해 김창기 편집국장과 송경호 정경부장, 문선공 등이 수사를 받았다. 정경부장은 40일간 구속 수사 끝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런데 <국민일보>가 폐간 조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견통령 사건 1년 전에도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1952년 5월 29일, 김성수 부통령이 국회에 낸 사표가 수리되었을 때도 <국민일보>가 문제시되었다. 그런데 김성수 부통령이 사표를 낸 데에는 부산정치파동으로 인한 헌정 유린 사태에 대한 항의 표시가 있었다.

수난시대
▲ 옛 청주시내 1960년대 중반 청주시 북문로에서 본 남문로 시가지
ⓒ 충청북도
즉 이승만은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대통령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덧붙인 개헌안을 추진했다. 하지만 1952년 1월 18일 국회 표결 결과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원외) 자유당과 대한청년단을 동원하여 '정부 개헌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고 국회의원 소환 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 지방의원들의 국회 해산 결의안도 가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이승만은 1952년 5월 14일 정부의 수정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수정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쿠데타를 감행했다.

5월 25일 0시를 기해 잔존 공비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부산 일원과 전라남북도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날 약 40명의 국회의원을 태운 통근버스가 통째로 헌병대에 끌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5월 27일 공보처에서는 구속된 의원들이 국제공산당의 비밀 정치 공작에 관련되었다고 발표했다.

5월 28일 국회는 부산지구 계엄령 해제를 결의했다. 5월 29일에는 김성수 부통령이 이승만의 헌정 유린 사태에 항의하며 초대 부통령 이시영에 이어 두 번째로 부통령직을 사임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2008).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김성수 부통령의 사퇴와 관련해 <국민일보>가 오보를 냈다. '이때 돌연 부통령이 사퇴'를 '이 대통령이 사퇴'로 보도한 것이다. 이는 <국민일보> 통신부장이 서울로부터 무전을 받는 과정에서 내용을 잘못 이해해 발생한 웃지 못할 코미디였다.

하지만 보도 결과는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었다. 편집국장 김창기, 편집부장 김진목, 통신부장 이응기, 번역기자 정아무개씨 등이 구속되었다. 편집부장은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국민일보> 수난 3탄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1953년 11월 '한·일 회담'을 '일·한 회담'으로 보도한 것이다. 사실 한국과 일본이 회담을 각기 표현할 때에는 자국의 국가명을 앞에 표기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국민일보>가 실수로 일본을 앞에 표기한 것이다. 정정 기사를 냈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편집국장과 정경부장 송경호, 문선공 등이 수사를 받았다. 정경부장은 40일간 구속 수사를 받은 끝에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로 인해 충청북도의회에서 '국민일보 폐간 결의안'이 제출되었다. <국민일보> 출신 홍원길 의원은 "편집 과정에서의 단순한 실수이자 오보"임을 동료 의원들에게 설득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폐간 결의안은 2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홍원길은 이에 항의해 1953년 11월 13일 의원직을 내던졌다(홍원길, <청곡회고록>, 1978). <국민일보> 폐간 조치로 인해 충북은 4개월 동안 신문 없는 도(道)로 지냈다.

4사 5입
▲ 송수탑 대통령 리승만박사 송수탑
ⓒ 충북역사문화연대
<국민일보>가 세 차례나 수난을 겪은 것은 단순한 코미디였을까? 그렇지 않다. 1950년대 대한민국 사회는 단순한 실수를 실수로 용납하지 않는 시대였다. 이승만의, 이승만에 의한, 이승만을 위한 전체주의 사회였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산정치파동 이후 이승만은 발췌개헌안을 제출했다. 발췌개헌안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절충하여 만든 급조된 개헌안이었다. 개헌안은 이승만 반대파가 구속된 상태에서 표결에 부쳐졌다.

개헌안에 대한 찬·반 표결이 기립 방식으로 이루어져 비밀투표의 원칙에 위배되었다. 개헌안 통과 후 직선제로 1952년 8월 5일 정·부통령 선거를 치렀다. 선거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이, 부통령에 함태영이 선출되었다.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한 헌정 유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발췌개헌안에 의하면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었기 때문에 1956년에 임기가 만료되면 이승만은 더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하기 위해 또다시 개헌을 하고자 했다.

1954년 9월 6일, 자유당의 이기붕 의원 외 135명이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핵심 요지는 현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였다. 개헌안은 11월 27일 표결에 부쳐졌다. 결과는 전체 203명 중 가(찬성) 135표, 부(반대) 60표, 기권 7표, 결석 1표였다. 개헌 정족수인 136표에서 1표가 부족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최순주 국회부의장은 개헌안이 1표 차이로 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자유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하여 공보처장 갈홍기의 이름으로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라도 무방하다는 내용의 특별 담화를 내는 등 개헌안 부결 번복을 위해 총력전에 나섰다.

같은 날 저녁, 자유당 수뇌부는 서울대 수학과 교수 최윤식 등을 동원해 203의 3분의 2가 135라는 희한한 방식을 착안하고 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해 개헌안이 통과된 것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자유당 의총은 성명을 통해 "재적 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정확하게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4사 5입의 수학적 원리에 따라 가장 근사치의 정수인 135명임이 의심할 바 없으므로 개헌안은 가결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른바 '4사 5입 개헌'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한 길이 열린 것이다.

1956년 3월 5일 자유당은 제3대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추대했다. 이때 81세의 고령이었던 이승만은 대통령에 입후보하는 데 순수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먼저 "출마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라는 유시를 내렸다. 하지만 불출마 의사 표명은 "민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출마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전국 각지에서 강제로 동원된 민의가 발동되었다. 심지어 우마차조합에서는 우마차 800대를 동원해 "소와 말까지 출마를 원한다"라고 외치며 서울 거리를 '똥바다'로 만들었다. 소위 '우의마의(牛意馬意)'라는 신조어가 탄생된 배경이다.

제3대 대통령에는 이승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사회는 본격적으로 극단적 반공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 언론 탄압도 본격화되었다. <동아일보>는 1955년 3월 15일 오식 사건으로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고, 관계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를 요구하는 시위가 1955년 8월부터 12월까지 전국에 걸쳐 있었다. 이 시위에 학생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이에 <대구매일신문>은 1955년 9월 13일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이 사설은 이적 행위로 몰렸다. 국민회 경북 총무차장 김민과 자유당 경북도당부 감찰부장 홍영섭 등 약 20명의 청년이 곤봉과 해머로 무장하고 <대구매일신문>사를 습격했다. 이런 시대에 발생한 <국민일보>의 오식 사건은 본격적인 언론 탄압은 아닐지라도 이승만 시대의 우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

설렁줄

이승만은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한 조봉암을 사법 살해했고, 진보당을 해체시켰다. 이승만은 야당 탄압과 언론 탄압을 본격화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에 대한 일상적 감시 체제를 강화했다. 다음 기사를 보면 그 상황을 알 수 있다.

"본도 경찰서에서는 빈발하는 강력범을 미연에 방지하며 또한 사건 발생을 속히 인근 주민들에게 알리게 하여 단시간 내에 범인을 체포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방범 설렁줄 설치를 계획하여 일반 도민에게 보급시키게 되었다는데 동 설렁줄은 5호 1통을 단위로 하여 새끼나 끄나풀을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연결시켜 놓고 유사시에는 이 설렁줄을 흔들어서 이웃집에서 연락을 하도록 마련~"(<충북신보> 1954.3.20).

5호 단위로 설렁줄을 설치해 의심나는 외부인이 오면 설렁줄을 흔든다는 것은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로 규정하는 전근대적인 제도이다. 이 제도는 조선시대의 조세 징수를 위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본뜬 것이다. 오가작통법은 세금 징수와 관련해 연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오가작통법과 설렁줄은 주민 감시의 극단적인 시스템이었다.

1949년 7월부터 실시된 유숙계 제도는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감시 체제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유숙계란 유동 인구 파악을 위해 외부 사람이 거주자의 집에 묵으면 반원(세대주)이 소속 반장에게 신고하고, 반장은 유숙인의 본적·현주소·여행 목적·세대주와의 관계 등을 정해진 양식에 따라 적어 파출소에 신고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유숙계 대상에는 외부인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도 포함되었다. 부모님이 지방에서 올라와 아들 집에 자면, 그 아들은 지서에 반드시 신고해야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족들까지 사상을 검열하고 의심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의 방첩표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내 마을, 내 집에는 공산도배 없는가?'(<충북신보> 1954.10.28).

탄신일 기념행사
▲ 이승만 생일 잔치 이승만 대통령의 84회 생일(1958년) 축하 경로 대회 참석자 수송 버스
ⓒ 충청북도
1950년대에는 매년 3월 26일에 '탄신일 기념 행사'를 치렀다. 마치 그날은 국경일처럼 지냈는데, 그 이유는 이승만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청주에서는 청주공고나 무심천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해 경축 대회를 개최했다. 1957년 3월 26일에는 이승만 대통령 제82회 탄신일 경축 행사를 청주공고 외 도내 여러 곳에서 거행했다(충청북도 충북학연구소, <충북 100년 연표>, 2004). 청주·청원 지역 마을마다 대형버스가 다니며 노인들을 행사장으로 실어 날랐다.

청주극장에서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경로잔치를 벌였는데, 여경을 포함한 경찰들이 동원되어 노인들에게 술을 따라주기도 하고 수건과 담배를 기념품으로 주었다. 심지어는 가가호호 국기 게양을 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승만 시대의 웃지 못할 블랙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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