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자-정선희 사연에 '도둑년' 소리 듣던 때가 생각났다

김지은 2026. 3. 30.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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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그거 봤어?] tvN <남겨서뭐하니>... 애정하는 사람들의 존재

짧은 숏폼 콘텐츠가 대세인 시대에 느림에 주목합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성공보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드라마나 예능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인생의 지혜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김지은의 그거 봤어?'에서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김지은 기자]

봉우리와 계곡은 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계곡 같은 곡선이 나타난다.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세상에서 못할 게 없고, 앞으로도 이런 인생이 계속될 것만 같다. 반대로 낮은 곳에 있을 때는 세상에 나만큼 못난 사람이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눈앞이 깜깜하다. 그래서인가. 자기 자랑만 가득한 이야기가 아닌, 이런 굽이굽이 봉우리와 계곡을 잘 통과해온 인생 이야기에는 언제나 귀가 활짝 열린다.

지난 23일 방송된 tvN 예능 <남겨서 뭐하게> 35화에 이영자와 친한 정선희가 출연했다. 그 둘은 훈훈한 시절을 회상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영자와 정선희는 <금촌댁네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이영자는 정선희의 개그 스타일을 높게 평가하며 세심하게 챙겨주었다고 했다. 대화는 곧 정선희가 힘들었던 시절, 인생 그래프가 바닥을 찍었을 때로 이어졌다. 결혼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남편과 사별했으며, 빚과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렸다.

정선희의 일상 회복을 도운 사람들
▲ <남겨서뭐하게> 35화 정선희 편.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경실을 회상하는 정선희.
ⓒ tvN
그때 이경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힘든 시기를 먼저 겪었던 사람이었기에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잘 될 거야'라고 위로할 때, 이경실은 정신 차리라며, "이제부터 더 힘든 일이, 더 억울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무시무시한 악플과 소문에 대응할 힘이 없어 숨어있을 때, 이경실은 "낙지 탕탕이 좋아해?" 같은 일상적인 안부 전화로 위로를 건넸다. '이제 평범하게 살긴 틀렸구나' 하고 낙담할 즈음, "너 머리 염색할 때 됐다"라는 평범한 말들로 정선희가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해주었다.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을 보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는 꼭 힘들었던 시절이 있다. 그 시절을 지나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 고통의 시간은 비단 그걸 경험한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그 시절을 지나는 사람에게도 적절한 도움을 건넬 수 있다. '다 잘 될 거야'라는 흔한 위로가 아닌, 이경실이 건넸던 평범하지만 단단한 위로가 그렇다.

이영자는 당시 그런 이경실에게 많이 배웠고,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부족한 것을 자책했다고 고백했다. 이를 들은 정선희는 "이영자의 애정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선희가 입원했을 때 지인들을 불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동분서주하던 이영자의 발이 맨발이었다고 했다.
▲ <남겨서뭐하게> 35화 정선희편. 늦었지만 이영자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정선희.
ⓒ tvN
힘들 때 그 발이 문득문득 떠올랐고 이영자의 애정이 큰 힘이 되었다고 전했다. 이 이야기를 만나서 꼭 해주고 싶었다고. 이영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심을 전달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두 사람의 역사가 오래되었고, 막역한 사이지만, 아끼는 마음을 전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아 이렇게 방송에 기대기도 하는가 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다. 부모님께, 아이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어도 막상 그런 이야기는 쑥쓰러워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곤 한다. 대신 가벼운 유튜브 콘텐츠나 다른 사람 이야기만 늘어놓을 때가 많다. 한참을 주저하다 들릴 듯 말 듯 "고맙다"라고 말하지만, 일단 내뱉고 나면 다른 얘기만 늘어놓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후련하다.
▲ tvN<남겨서뭐하게>35화 정선희편. 포털 사이트 담당자와의 에피소드를 말하는 정선희.
ⓒ tvN 남겨서뭐하게
정선희는 이어서 그 시절에 있었던 사건 하나를 더 이야기했다. 과거 힘든 일이 있었을 때, 포털 사이트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오열하는 자신의 사진을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못 지운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이 당사자인데 그걸 왜 못 지우냐고 따졌더니 관계자가 담담하게 "웃는 얼굴로 덮으시면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지울 수 없다면 더 좋은 것으로 덮으면 된다'는 말은 그녀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상처, 지울 수는 없지만 덮을 수는 있다

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학창 시절 도둑으로 몰렸던 기억. 선생님께서 반장이었던 나에게 돈을 맡기셨고, 나는 그 돈을 선생님께 돌려 드렸는데 선생님은 받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반 아이들이 모두 있을 때 드렸는데도 본 사람이 없었다. 선생님은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했고, 엄마가 그 돈을 마련해 선생님께 드렸다.

그 뒤로 아이들이 날 '도둑년'이라고 불렀는데 신기하게도 그 시절이 아주 고통스럽게만 남아 있지는 않다. 날 믿어주었던 몇몇 친구들과의 추억, 그리고 이후의 즐거운 사건들이 그 상처를 덮어주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계속되고, 어떤 사건도 삶 전체를 망가뜨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선희의 말대로 상처를 지울 수는 없지만, 좋은 것으로 덮을 수는 있었다.

요즘 나는 소설 습작을 하는데 기본적으로 소설은 '처음에는 이랬던 사람이, 어떤 사건을 겪고 난 뒤, 이렇게 변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소설은 신기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니다. 인물이 다양한 사건을 겪고 변하는 이야기다. <남겨서 뭐하게> 정선희 편을 보고 나니 꼭 소설 한 편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 주인공이 굽이굽이 봉우리와 계곡을 통과한 후, 더 단단해진 이야기.

엄청난 일을 겪었으나 주변의 사랑과 생각의 전환으로 그 힘든 시기를 넘어온 정선희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예고를 보니 30일 방송에서는 정선희가 <금촌댁네 사람들>을 함께 찍었던 동료들을 다시 만나 고마움을 전하는 자리가 이어진다. 나도 내 주변의, 혹은 한 시절 나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어졌다. 자,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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