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대신 ‘N잡러’ 전선으로… ‘통계 밖 노동’ 되레 늘었다
줄어든 근로시간 휴식 아닌 ‘부업’
中企 근로자는 5년새 37%나 급증
현 소득 한계·미래 불안에 못 쉬어

“지금 다니는 회사는 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해요. 본업만으로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려운 시대가 됐잖아요.” 직장인 한모(34)씨에게는 퇴근 후 또 다른 일터가 열린다. 유통업계에서 사내 강사로 일하는 그의 일과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블로그 게시글을 업로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주말에는 일자리 중개 플랫폼을 통해 외부 강의를 병행한다. 모두 조금이라도 수익을 얻고 있는, 일종의 ‘일’이다. 최근에는 마케팅 업무와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 개발을 시도하며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주 52시간제 시행 8년 차를 맞았지만 ‘일에 빠진 한국인’의 모습은 여전하다. 한씨처럼 퇴근 이후 시간을 또 다른 일에 쓰는 ‘N잡족’이 늘면서다. 그러나 그들의 근로 시간은 제대로 집계되지 않는다. 2024년 한국인의 근로시간이 약 2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데이터가 나온 이유다. 주 52시간제 시행 효과는 통계 속 숫자로 드러나지만, 실제 사회 현상을 충실히 반영하지는 않는 셈이다.

줄어든 노동시간이 ‘휴식’ 아닌 ‘부업’으로 흡수되는 흐름은 여가시간 데이터로 확인된다. 29일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평일·휴일을 합한 하루 평균 여가시간은 4.3시간이었다. 한국인의 여가시간은 최근 5년간 4시간 안팎에 머물러 있다. 2006년(3.8시간)보다 개선 폭이 크지 않을뿐더러, 주 52시간제가 전면 시행된 2021년(4.4시간)보다는 오히려 줄었다.

다른 데이터를 보면 아이러니한 수치 변화가 등장한다. 국가데이터처의 ‘생활시간조사’와 ‘국민 삶의 질 2025’ 등에 따르면 임금근로자의 2024년 월평균 근로시간은 146.8시간으로 집계됐다. 전년(157.6시간)보다 무려 10.8시간 줄어든 수치다. 2006년(193.4시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통계상으로 ‘덜 일 하는데 덜 쉬는’ 상황을 보여준다.
이는 주 52시간제가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확대라는 정책 목표를 달성했다기보다 ‘노동의 형태’가 바꿨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중소기업에 다니는 노동자들은 적극적으로 부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발간한 ‘중소기업 임금근로자의 일시휴직 및 부업 실태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중소기업 임금근로자 중 부업 종사자는 37만9000명에 이르렀다. 5년 새 37.1% 급증한 수치다. 중소기업 정규직으로 모집단을 좁혀봐도 부업 인구는 20만명에 이른다.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최대였다.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을 중심으로 ‘비임금 노동’ 시장이 가파르게 팽창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국세청에 따르면 인적용역 사업소득 원천징수 대상 인원은 2019년 669만명에서 2024년 869만명으로 5년 만에 약 200만명 늘었다. 유튜버 등 1인 미디어 콘텐츠 창작자는 같은 기간 4874명에서 8만7명으로 16배 넘게 폭증했다. 전문성을 수익화하려는 지식 서비스형 부업도 등장하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소프트웨어 프리랜서’ 항목 사업자는 2024년 3만2908명을 기록했다. AI 기반 서비스나 앱 개발 등 전문 기술을 부업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이들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규모를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눈에 띄는 점은 N잡족들이 자신의 부업을 돈을 벌기 위한 ‘노동’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씨는 부업에 쏟는 시간을 ‘자기 성장’이나 ‘자기실현’의 시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 인식도 깔려 있다. 본업에서 느끼는 보상의 한계와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이 이들을 쉬지 못하게 만드는 핵심 동력이다. 한씨는 “회사에서의 보상에 대한 아쉬움과 미래 소득에 대한 불안도 있다”며 “본업보다 부업의 수익이 더 커지더라도 두 활동 모두 지금처럼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결국 소득 불안이 심해지며 ‘통계에 잡히지 않는 노동’이 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식 통계에서는 부업 규모가 과소 포착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최바울 국가통계연구원 경제사회통계연구실장은 “부업은 응답자가 자율적으로 밝히는 방식이라 실제보다 적게 잡힐 수 있다”며 “겸업이 제한된 직종이나 회사 분위기 등을 고려해 응답을 꺼리는 경우도 있어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세종=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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