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평화헌법 9조의 정치경제학: 세계유산으로 남겨야…

김영근 2026. 3. 2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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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프로세스를 '즐기는' 자민당 정치의 속내

개헌이 실현되는 순간, 자민당은 80년간 자신을 먹여 살린 공약을 잃는다. 개헌은 자민당에게 목적지가 아니다. 영원히 도달해서는 안 되는 지평선이다. <기자말>

[김영근 기자]

놏쳐서는 안 될 일본 자민당의 '개헌정치'
- 자민당에게 개헌은 완성이 아닌 과정 — 논의 지속 자체가 선거 전략
- 개헌론자 다카이치가 평화헌법으로 트럼프 파병 요구를 막았다 — 이것이 일본 정치의 본질
- 개헌을 외쳐야 집권하고, 개헌을 완성하면 길을 잃는다. 자민당 80년의 본질은 이 역설 위에 세워져 있다.
2026년 3월 19일 백악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호르무즈 해협 파병 요구를 조용히 일축했다. "일본의 법률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는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이었다. 이 장면의 극적인 아이러니는 거절의 당사자가 바로 개헌의 선봉장이라는 사실에 있다. 평화헌법을 고쳐 전쟁 가능한 나라로 가겠다던 총리가, 정작 평화헌법 덕분에 전쟁 참여를 거절할 수 있었다. 이 선명한 역설 앞에서, 우리는 일본 개헌 정치의 본질을 다시 물어야 한다.
 지난 19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일본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만찬을 주최하며 발언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EPA=연합뉴스
개헌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자민당의 개헌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개헌을 목표로 삼아 선거를 치르는 '과정' 자체가 자민당 정치의 핵심 동력이다. 이것이 전후 80년간 일본 보수 정치가 작동해 온 내국정치의 메커니즘이다.

2026년 2월 8일 중의원 총선거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전체 465석 중 단독으로 316석을 확보하며 역대 최다 의석을 기록했다. 단일 정당이 중의원에서 3분의 2 이상 의석을 차지한 것은 전후 처음이다. 표면상 개헌이 눈앞에 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조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본에서 개헌안을 발의하려면 중의원과 참의원 양원에서 각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현재 참의원에서 자민당과 연립 파트너인 유신회의 의석수를 합하면 전체 248석 중 120석으로, 과반(125석)에도 미치지 못한다. 국민민주당과 참정당 의석수를 합산해도 참의원 3분의 2선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오쿠조노 히데키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자민당의 압승으로 개헌 논의가 빨라질 수는 있지만, 참의원에서도 개헌 세력이 3분의 2를 차지하지 못하면 개헌안을 발의하지 못한다"고 잘라 말한다. 참의원 구성을 바꿀 수 있는 다음 참의원 선거는 2028년이다. 이 구조적 장벽은 단기간에 극복될 성질이 아니다.

아베의 교훈: 개헌 논의 자체가 선거 전략이었다

이 구도는 오늘이 처음이 아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7년 5월 헌법 기념일에 개헌 시한을 2020년으로 공언했다.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하는 것을 1단계로, 이후 9조 본문을 고치는 2단계 개헌을 통해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자민당은 야권의 반발로 헌법심사회조차 제대로 열지 못한 채 개헌안의 국회 발의에 실패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개헌을 "아베 전 총리의 유산이자 일본 보수의 숙원"으로 규정하면서도 "헌법 구조를 둘러싼 정당 간 인식 차도 커서 개헌이 현실적으로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고 전망한다.

당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참의원 선거 기간 내내 아베 총리가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 선거 전략으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개헌 논의 자체가 우파 지지층을 결집하는 핵심 도구였다는 분석이다. 아사히신문 여론조사에서 국회에서의 개헌 논의를 서두를 필요가 있는가를 묻자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72%로 압도적이었다. 헌법 9조 개정에 대해서는 '바꾸지 않는 쪽이 좋다'는 의견이 61%로, '바꾸는 쪽이 좋다'는 30%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자민당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개헌을 '실현'하는 대신 개헌을 '주창'하는 정치가 반복된다.

국민투표라는 더 높은 장벽

설령 2028년 7월에 실시될 참의원에서 3분의 2 장벽을 돌파한다 해도 최후의 관문이 남아 있다. 국민투표다. 일본 헌법 개정은 양원 발의 이후 국민투표에서 과반 찬성을 얻어야만 확정된다.

아베 내각 시절 30~50대 여성들 사이에서는 "아베가 밀어붙이는 개헌이 실현되면 자녀 세대가 조상들처럼 전쟁의 참상 속에서 희생되지 않을까"라는 우려에서 지지율이 현저히 낮았다. 이 공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기억, 오키나와의 집단 옥쇄 기억이 일본 사회에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이원덕 국민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는 "비극적인 전쟁을 경험한 일본 국민들은 80년이나 된 평화헌법을 굳이 바꿔 자위대를 보통 군대로 만드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기 때문에 현 정부에서도 평화헌법 개정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내다본다.

80년 만의 첫 개헌 시도가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경우 다카이치 내각이 감당해야 할 정치적 후폭풍은 가늠하기 어렵다.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자민당 보수 노선 전체의 도덕적 패배가 된다. 따라서 실제 국민투표는 더욱 요원한 선택지다. 다카이치 총리 스스로도 중의원 압승 직후 기자회견에서 "각 회파의 협력을 확보해 가능한 한 조속히 국민투표가 실시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도록 끈질기게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끈질기게 노력하겠다'는 표현 자체가 이미 쉽지 않음을 자인한 것이다.

평화헌법 9조가 증명한 것

이번 호르무즈 위기는 역설적으로 헌법 9조의 현재적 가치를 가장 강렬하게 증명한 사건이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파병 논란은 일본의 헌법적·국내법적 제약뿐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자위대의 군사 개입에 대한 상당한 거부감이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줬다"고 말한다. 만약 헌법 9조가 없었다면, 다카이치 총리는 트럼프의 파병 요구를 거절할 명분을 찾기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개헌론자들은 "일본도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헌법의 제약이 사라지는 순간 동맹의 이름으로 군사 협력을 요구하는 압력 또한 그만큼 거세진다. 일본이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약 43조 5000억 엔의 방위비를 집중 투입하기로 한 상황에서, 사실상의 재무장은 이미 진행 중이다. 헌법 9조는 명문 개정 없이도 2015년 안보법제 개정을 통한 집단자위권 용인 등 '해석 개헌'으로 실질적으로 잠식되어 왔다. 그럼에도 헌법 조문으로서 9조가 살아 있는 한, 그것은 일본 외교의 유효한 방패로 기능한다. 개헌론자 다카이치가 실제 군사 분쟁 앞에서 평화헌법을 방패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사실을 몸소 입증한 셈이다.

주변국의 긴장, 한국의 시각

일본의 개헌 논의는 결코 일본만의 내부 문제가 아니다. 자위대를 헌법에 명기하고 군사 대국화에 나설 경우 한국 등 주변국을 긴장시킬 수 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의 지역 안보 책임 분담 기조는 일본의 역할 확대 요구와 맞물려 군사력 정상화 논의를 자극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동북아 핵 도미노 가능성까지 우려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특히 자민당이 개헌 논의를 국내 정치 결집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독도 영유권 주장, 야스쿠니 참배, 역사 수정주의적 발언 등 주변국과의 외교 마찰을 자초하는 패턴은 멈추지 않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가 중의원 압승 직후 방송에서 "야스쿠니 신사 환경 정비가 필요하다"고 발언한 것은 이 패턴의 전형이다. 한국의 이재명 정부로서도 개헌 논의 자체보다 그 논의가 촉발하는 일본 내 우경화 담론과 주변국 마찰의 파급 효과를 예의주시해야 한다. 한일 관계의 안정적 관리는 개헌이라는 변수를 냉정하게 계산하는 전략적 시각 위에서만 가능하다.

9조는 일본의 유산이자 동아시아의 공공재다

1947년 공포된 일본 헌법 제9조는 패전과 반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인류가 전쟁의 참화에서 길어 올린 보편적 지혜다. 개헌론자들은 이를 "점령군이 강요한 굴욕의 조항"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전쟁의 부정이자 평화에 대한 약속이다.

자민당은 앞으로도 개헌을 선거 공약으로 삼아 의석을 모으고, 참의원의 장벽을 이유로 발의를 미루고, 국민투표의 불확실성을 핑계로 실행을 회피하는 '개헌 정치의 무한반복'을 계속할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꿰뚫어 보는 것이 일본 정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평화헌법 9조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안정, 나아가 전쟁 없는 세계를 향한 인류의 집단적 유산이다. 호르무즈 위기에서 9조가 증명한 것처럼, 이 조항이 일본 외교의 유효한 방패이자 동아시아 평화의 제도적 기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개헌 프로세스는 계속될 것이다. 자민당 정치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헌의 완성은 요원하다. 일본 국민과 주변국 시민 모두가 이 구조를 명확히 인식할 때, 비로소 개헌 포퓰리즘의 마력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진지한 대화가 가능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파인에도 실립니다.글쓴이 김영근은 현재 고려대학교 글로벌일본연구원 겸 인문학과동아시아문화산업과정 교수이다. 도쿄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를 취득한 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및 계명대 일본학과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AI시대의 안전경제학: 글로벌 불확실성 및 위기관리"『한일경상논집』,『3·11 동일본대지진을 새로이 검증하다』(단역),『일본 원자력 정책의 실패』(단역),『재해 리질리언스: 사전부흥으로 안전학을 과학하자』(공저),『일본의 재해학과 지방부흥』(공저) 등 다수의 논문과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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