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사가 발표한 경이로운 시... 한국에서 읽지 못했던 이유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3. 28. 19:4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어떤 어른]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던 시인, 백석

[김종성 기자]

 시인 백석
ⓒ 자료사진
26세의 영어교사 백석은 1938년 3월호 <여성>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발표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로 시작하는 작품이다.

그는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밤 힌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산골로가 마가리에살자"라고 읊었다. 그런 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라고 노래했다.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나타샤라는 이름은 이 시에 이국적 느낌을 부여한다. 평안북도 방언인 마가리(오두막집) 및 '고조곤히'와 더불어 '소주'가 그런 이국적 느낌과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한국 문학의 지평 넓힌 백석의 시 세계

평북 정주군에서 태어났고 본명이 백기행(白夔行)인 시인 백석은 세계 문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지금처럼 외국작품 번역이 활발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그런 경지를 이루려면,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강릉원주대학교 2012년도 박사논문인 김완성의 '김소월과 백석 시의 민족의식 연구'는 백석이 1930년부터 유학한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언급하면서 "그는 청산학원 시절에 전공인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어·러시아어·독일어·프랑스어까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특출한 외국어 실력을 통해 축적한 세계문학 지식을 작품 속에 담으면서도 독자들이 낯선 느낌을 갖게 만들지 않았다. 그는 이국적인 것과 토속적인 것을 자연스럽게 융합시켰다. 이는 그가 자기 뿌리를 잊지 않는 문인이기 때문에도 가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가 문단에 데뷔한 것은 열일곱 나이로 오산고등보통학교(오산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0년이다. 이때 조선일보사 '신년현상문예'에 당선됐다. 이는 그가 신문사 후원으로 아오야마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그때 당선된 작품은 '그 모(母)와 아들'이라는 단편소설이다. 그가 시인으로 등단한 것은 1935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다. 고향에 관한 시를 첫 작품으로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자기 것을 기반으로 세계를 품는 그의 시 세계는 이때부터 펼쳐졌다.

"산턱 원두막은 뷔엿나 불비치외롭다/ 헌겁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쏘 는소리가 들리는듯하다"라는 구절로 시를 시작한 백석은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성터/ 반디불이난다 파 란혼(魂)들갓다/ 어데서 말잇는듯이 크다란 산새 한머리가/ 어두운 골작이로 난다"라고 읊었다. 그런 뒤 "헐리다 남은성문이/한울빗가티 훤 하다/ 날이밝으면 또 메기수염의늙은이가 청배를팔러 올것이다"라고 끝맺음했다.

정주성은 1812년에 홍경래가 전사한 유적지다. 이곳은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19세기 대중의 희망과 좌절이 스며든 곳이다. 그런 공간을 백석은 만주사변(1931) 이후의 일본제국주의가 대륙 침략에 광분할 때인 1935년의 시대 분위기에 맞게끔 자기 작품 속에 담았다. "무너진 성터", "헐리다 남은 성문"은 이 시대 사람들의 비애와 적막감, 무상을 반영할 만한 표현들이다.

평북 정주는 저명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백석의 오산학교 선배인 김소월(1902~1934)도 이곳 출신이다. 단편소설 <불꽃>을 남긴 선우휘(1922~1986)도 동향 사람이다. 친일파들인 이광수(1892~1950)와 김억(1895~?)도 마찬가지다.

정주는 평북 서해안과 청천강 입구가 만나는 곳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서 걸출한 문인들이 여럿 배출된 것은 이 지역 문화와도 무관치 않다고 볼 수 있다.

정주를 포함한 평안도는 한양 중심의 조선왕조 체제하에서 소외와 차별을 받은 대표적 지방이다. 그래서 정주는 정치적 한(恨)이 응축된 곳이다. 이는 홍경래의 변혁운동(홍경래의 난)이 이곳을 무대로 전개된 원인 중 하나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 내내 정주 땅과 그 땅 위의 사람들에게 스며든 이 한은 19세기 후반에 급속히 유입된 외래문명과 융합되어 새로운 정서 혹은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민족주의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인 오산학교가 이곳에 세워져 20세기 한국 역사에 영향을 미친 것도 그런 분위기의 산물이다. 구한말에 급속히 변모한 이곳의 문화적 바탕은 이곳 문인들이 여타 지역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데 유리한 요소였다.

그런 정주에서 자라나 시인으로 데뷔한 백석은 '주막', '여우난골족', '고야', '통영', '남행시초', '함주시초', '바다', '물닭의 소리' 등을 발표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그는 자신의 문학은 물론이고 한국 문학의 지평까지 함께 확장시켰다.

여우가 나는 골짜기에서 친족들이 명절 쇠는 모습을 다룬 '여우난골족'(1935)은 북적거리는 친족공동체의 정겨운 풍경을 보여준다. 평안도 방언인 '진할머니'로 '친할머니'를 대체한 이 시는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이라는 첫 구절로 시작한다.

그런 뒤 등장인물 몇몇의 특성과 인생 내력을 언급한 다음, 친족들이 조부모의 안방에 모여 있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라고 묘사한다.

명절이나 돼야 새 옷을 입을 수 있었던 시절에 친족들이 안방에 모여드니, 새 옷 냄새가 방 전체 물씬 퍼진다. 집안 전체에서는 평소 같으면 접하기 힘들었을 떡 냄새가 풍긴다. 여기에 두부·콩나물·잔디·고사리·돼지비계의 왠지 차가운 듯한 시각적 이미지가 함께 어우러진다. 백석이 알려준 1910년대 및 1920년대의 평안북도 골짜기 명절 풍경이다.

남한에서 기피인물이 된 백석
 서울 성북구에 있는 길상사. 백석의 연인이었던 김영한이 재산을 기부해 만들어진 절이다.
ⓒ 연합뉴스
1930년대의 저명한 문인들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친일파가 되기 쉬웠다. 친일파 사장이 경영하는 신문사의 장학생이 유명한 시인이 됐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크다. 이런 시절에 <조선일보> 장학생 백석은 그쪽으로 넘어가지 않고 자기의 시 세계를 지켜냈다. 그는 정치적 풍파에 휘둘리지 않고 대중과의 문학적 공감을 주체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역량 있는 문인이었다.

그런 시인을 해방 이후의 이남 사람들은 오랫동안 접하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남한에서 마지막으로 발표된 것은 1948년이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끝으로 그는 남한 사람들과 이별했다.

그는 남한에서 기피인물이 됐다. 1938년에 교사 일을 그만둔 뒤 서울로 이동했다가 만주국으로 넘어가 1940년부터 공무원 생활을 한 그는 해방 뒤 귀향했다. 미군정이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세워질 때 그는 고향에 그대로 있었다. 반공정권의 논리에 따르면 지식인이 이렇게 하는 것은 '월북'이었다. 1996년 7월 4일 자 <동아일보>는 "분단 이후 고향인 이북에 남았다는 이유로 월북문인으로 분류돼 문학사에서 잊혀졌던 작가"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작품을 남한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1988년이다. 그해 7월 19일 자 <경향신문> 기사인 '해금된 월북작가 명단'에서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해금조치는 전년도 6월항쟁의 성과다. 한국인들이 전두환의 기를 꺾지 못했다면, 그와의 재회는 좀 더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북한 문단에서 백석은 자유롭지 못했다. 외국작품 번역과 동시·동화시 발표 등에 주력하며 체제와의 갈등을 최소화하던 그는 1957년에는 자아비판을 했고 1959년부터는 국영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치기 일을 했다. 어느 정도는 체제와 타협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50세 때인 1961년 이후로는 더 이상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다. 그런 뒤 1996년에 향년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백석은 토속과 세계를 연결시키는 작품 활동으로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히면서 당대 한국인들의 정서를 시 속에 담아냈다. 백석이 자야(子夜)라고 부른 연인 김영한이 경영하던 요정 대원각이 서울 성북구의 길상사로 변모해 있어, 20세기 한국이 낳은 이 걸출한 시인의 체취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