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두고 일기 쓴 류이치 사카모토, 나도 저럴 수 있을까
[김상목 기자]
세계적 명성과 업적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2020년, 자신이 치료 불가능한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싶은 열망에 그는 항암 치료를 이어가며 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3년 6개월에 걸쳐 기록된 일기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내적 고뇌와 함께 인생의 황혼에서 생애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모색으로 가득하다. 2023년 3월 사망 후 고인의 유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입수한 방대한 자료와 접촉의 결과로 사카모토 류이치의 마지막 시간이 조명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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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스틸 |
| ⓒ (주)영화사진진 |
시간이 좀 지났다. 2020년, 그는 자신이 심각한 암 말기 상황임을 파악한다. 담담히 가족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 뉴욕을 떠나 일본의 임시 거처로 옮겨 투병 생활을 준비한다. 암 발병 부위를 대수술로 도려내지만, 전이는 예상치를 이미 초과한 상태다. 수술 대신에 투약 치료를 선택한 음악가는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자신에게 질문하며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못다한 것들과 눈에 밟히던 일들을 차분히 정리하기 시작한다.
노년에도 변함없는 창작욕에 불타던 그에게 투병으로 인한 체력 저하는 조바심이 난 상태에서 어쩔 수 없는 질곡일 수밖에 없다. 힘이 부족해 이제 더는 장시간 공연을 소화할 수 없는 몸이다. 하지만 음악 혼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며 온라인 콘서트를 준비한다. 수척해진 얼굴, 앙상한 팔이 유독 두드러지게 보인다. 그러나 차분한 표정에 정돈된 의상을 갖춰 입은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아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대표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천천히 연주하자 공기가 일순 바뀐다.
작업할 때 자주 듣는 곡이지만, 화면에 흐르기 시작한 선율이 유독 귀에 감긴다. 느닷없이 눈시울이 불거진다. 이미 작고한 지 3년이 지났다. SNS에 나름의 추모글도 올렸던 바, 굳이 감정 과잉이 될 이유가 없다. 영화 역시 신파를 자극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연출하지 않는다. 단순히 거장의 불운한 마지막이 슬프다거나 그런 감정이 아니라, 사카모토 류이치의 업적과 생애를 구구절절 과시하듯 열거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곡을 떠올리는 순간 보물상자가 툭 열리듯 자동재생된 탓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는 그렇게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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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스틸 |
| ⓒ (주)영화사진진 |
마치 연작 같은 흐름 속에서 2025년 등장한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는 2024년 방영한
NHK 스페셜 'Ryuichi Sakamoto: Last Days' 극장판에 해당하는 작업이다. '선택과 집중'이 명백하다. 대충 사회 저명인사 부고 성격으로 미리 준비하는 연대기적 요약과 차원이 다른 건 확실하다.
NHK에서 다양한 주제 다큐멘터리 작업을 담당하던 오모리 켄쇼 감독은 황혼에 접어든 거장이 느끼는 음악은 어떤 형태와 색깔을 가질까에 주목한다. 화면을 거대한 캔버스 삼아, 사카모토 류이치가 말년에 도달한, 혹은 아쉽게 완결짓지 못한 음악적 실체를 추적하는 모험에 나선 것.
가장 명시적인 자료는 집요할 만큼 꾸준히 기록한 일기다. 가녀리지만 의지를 담아 꾹꾹 눌러쓴 일기부터 휴대전화 메모장까지 방대한 텍스트가 고인의 생각을 드러낸다. 여기에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경주한 말년 음악 활동 실황이 더한다.
그리고 활동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그가 구현하려던 지향에 궤를 같이하는 다양한 이미지/사운드 실험이 결합한다. 때로는 음악의 선율보다는 자연의 소리라 표현해야 마땅할 음향이 여백과 간격을 유지하며 스며들고, 종종 의도된 무음이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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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스틸 |
| ⓒ (주)영화사진진 |
첫 번째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와의 특별한 인연이다.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구호에서 출발해 재기와 치유를 위한 격려 일환으로 고인이 창설해 10년간 지휘를 맡았던 청소년 오케스트라다.
동일본 대지진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결부되고, 참사 애도와 피해 지원 과정에서 일본 사회의 성장지상주의와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 사카모토 류이치는 일각의 비난도 기꺼이 감수하며 열성적으로 생태 운동과 탈원전 요구에 나섰다. 사회참여는 평화헌법 수호와 여성인권 향상 목소리 등 타성에 젖은 일본 내 현안 곳곳으로 향했다.
말년까지 꾸준히 관련 목소리를 내던 고인은 매년 3월 열리는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 실황을 병상에서 휴대전화 액정으로 시청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임종 직전까지 눈에 밟히는 예술가의 사회참여와 공동체 의식은 담담히 바라만 봐도 가슴이 벅차다.
일본 국내에만 한정된 관심은 아니다. 투병 중에 발발한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켜보며 근심하던 그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반전 의식을 고취하는 우크라이나 바이올린 연주자 '일랴'에 감명을 받아 그와 협연으로 'Piece for Illia'를 내놓기에 이른다.
일련의 참여 활동을 보면 사카모토 류이치의 사회운동가 면모가 그의 음악과 자연스럽게 세상 만물 이치가 상통하는 듯 감흥에 젖게 된다. 하지만 그의 본체는 정통 클래식부터 전자음악, 월드뮤직 가리지 않고 융합하며 우리 국악인들과도 협연하며 교류하던 천재적 음악가란 점을 영화는 다시금 소환한다.
1978년 그가 호소노 하루오미,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결성한 전설적인 일렉트로닉 밴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YMO)' 시절이 등장하고, 동료들과의 우정, 함께 늙어가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이 진한 감흥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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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스틸 |
| ⓒ (주)영화사진진 |
그렇게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가 마지막 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차근차근 3년 반을 마무리에 할애한 주인공의 수고처럼, 에필로그가 남아 있다. 화면을 응시하던 관객은 어느새 자문할 수밖에 없다. 숱한 이들이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덧없는 집착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도망치는 풍경에 익숙한데, 과연 나는 저렇게 생을 마칠 수 있을까. 선망과 함께 다가오는 무게감이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마치 숨겨둔 유산을 익살스러운 유머와 함께 깜짝 나눔하듯 이 영화의 근원이 된 필사의 일기장을 그의 음악을 사랑하던 이들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긴 듯하다.
영화를 보고 나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고인의 음악을 재생하게 될 테다. 작품 속에서 흘러나오던 명곡들, <전장의 크리스마스>와 <마지막 황제>, <괴물>의 주옥 같은 선율을 다시 듣는다면, 저절로 화면 속 기품 있는 황혼을 맞던 누군가 떠올라 그리움이 사무칠 수밖에 없다. 아직은 그의 빈자리가 무척 휑하다.
Rest in Piece, Ryuichi Sakamoto (1952.01.17 – 2023.03.28.)
<작품정보>
류이치 사카모토: 다이어리
Ryuichi Sakamoto: Diaries
2025|일본|다큐멘터리
2026.04.01. 개봉|96분|전체관람가
감독 오모리 켄쇼
출연 류이치 사카모토, 타나카 민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제공/공동배급 ㈜더콘텐츠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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